1983년 10월 25일 미국이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미군 병력은 7,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육군 레인저스와 델타포스, 해군 네이비실, 해병수색대 샤크맨 등 특수부대가 주력이었다. 그레나다는 정부군 1,500여 명에 쿠바 공병 등 건설요원 700여 명이 교전에 가담했다. 소련과 북한 동독 등지에서 온 소수의 군사고문관도 있었다. 공식 집계로 미군과 동카리브해국가기구(OECS)의 도미니카, 바베이도스, 자메이카 지원군(총 300~500명) 19명이 전사(116명 부상)했고, 그레나다와 쿠바 측은 69명이 사망(396명 부상)했다.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국제법상의 불법 침략이었다. 미국의 명분은 그레나다의 불안한 정세에 현지 유학생과 미국인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였다. 실제 목적은 소련과 쿠바의 영향력 차단, 즉 인도차이나의 실패를 교훈 삼아 카리브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쿠바에 이어 니카라과 다니엘 오르테가의 산디니스타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미국의 작전명은 ‘다급한 분노(Urgent Fury)’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첫 대규모 ‘군사행동(곧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했다. 이듬해 말 선거로 그레나다에는 우파 정권이 들어섰고, 미국은 85년 6월 철군했다.
총인구 11만명가량의 그레나다는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다가 18세기 말 이후 영국 지배를 받았고, 1967년 영국 자치령을 거쳐 74년 독립했다. 부패 독재자였던 초대 총리 에릭 게어리 정부는 79년 좌파 계몽ㆍ혁명운동인 ‘뉴주얼(New Jewel) 운동’의 리더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의 무혈 대중혁명으로 무너졌다. 83년 10월 19일, 비숍 정부의 재무-상무 장관을 지낸 부총리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와 육군사령관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이 비숍과 각료 7명을 가택 연금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사태가 미국에 군사행동의 구실을 제공한 거였다. 계엄정부의 코드 등이 더 급진 좌파이긴 했지만, 그레나다는 이미 비숍 정부 때부터 소련 쿠바 등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비숍의 가택연금이 시작된 19일 수도 세인트루이스의 시민들은 대대적인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가 그를 앞세워 루퍼트항까지 행진을 벌였다. 계엄군은 거리에서 그들을 체포, 비숍과 그의 임신한 아내, 각료 7명을 벽에 세워 처형했고, 어린이까지 포함된 시민 100여 명을 학살했다. 그레나다의 시민들은 전쟁 자체보다 19일의 저 참사를 ‘순교자의 날(Martyrs Day)’로 기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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