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은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글이나 그림 따위로 나타낸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맨 물건”(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이다. 사전의 정의가 이렇게 분명한 이상, ‘종이책’이란 말을 쓸 여지는 없다. ‘책’의 속성인 ‘종이’로 ‘책’을 꾸미는 구조의 ‘종이책’은 결국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맨 물건’을 뜻하는 말일 테니.
1980년대 중반 시디롬으로 된 백과사전이 나오면서 ‘책’의 속성에 대한 인식에 균열이 생겼다. ‘전자책’이란 말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전자책’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상황에서도 ‘종이책’이란 말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책’의 원형은 여전히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매는 물건’이었으니, 그 변종인 ‘전자책’에 대응하는 말은 ‘책’으로 족했던 것이다. ‘종이책’이란 말이 등장한 건, ‘전자책’이 백과사전에서 단행본으로 영역을 넓히면서부터다. ‘책’을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맨 물건’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면서, ‘종이책’을 ‘전자책’에 대응하는 ‘책’의 한 형식으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빵’은 먹으려고 만든 것인데 왜 굳이 ‘식빵(食-)’이란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식빵’이란 말이 자리 잡은 과정은 ‘종이책’이란 말이 자리 잡는 과정과 유사하다. ‘전자책’이 등장하면서 ‘종이책’이란 말이 만들어진 과정에 비춰보면, ‘식빵’은 ‘빵’이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주식용 빵’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진 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식빵’이란 말이 일반화되면서, 한때는 ‘빵’ 그 자체였을 ‘식빵’은 어느 순간 ‘단팥빵’ ‘곰보빵’ 등과 더불어 ‘빵’의 한 종류가 되었다. 구별하여 지시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낱말은 진화를 거듭한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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