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권 글∙한병호 그림 ‘산에 가자’
산에 가자
이상권 글∙한병호 그림
보림출판사 발행∙34쪽∙9,500원
가을 산에 올랐다. 서울 안산 자락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따라나섰다. 자동차들이 꼬리를 이으며 매연을 뿡뿡 내뿜는 찻길을 하나 건너고, 비탈진 고갯길에 비죽비죽 솟은 고층아파트 단지를 끼고 도니 바로 안산 산책로다. 빽빽하게 늘어선 키 큰 나무 사이로 들어서자 가을 숲 향기가 훅 밀려든다. 싱그러운 여름 숲과는 사뭇 다르게 은근하고 그윽하다. 전날 내린 비로 촉촉해진 산길엔 둥글고 갸름하고 비죽하고 빨갛고 노랗고 아직 푸른 나뭇잎들이 고운 무늬를 그리며 흩뿌려져 있다. 황송한 기분으로 ‘사뿐히 즈려’ 밟았다. 주홍빛으로 발그레해진 덤불을 지나면 진갈색, 황갈색으로 물든 나무가 나오고, 아직 초록이 많이 남은 나무에 햇살이 비껴들면 물기 빠진 노란 잎이 말갛게 하늘거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이들, 스치고 지나는 이들의 얼굴이 환하다. 1,000만 인구가 복작대는 이 도시 곳곳에 이런 산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평탄한 자락길과 우툴두툴 돌길을 오가며 걷는데 시야가 트일 때마다 아파트 단지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산기슭마다 와글와글, 아예 산중턱까지 파고든 곳도 많다.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니 아득한 서울 시내가 마치 바다 같다. 드넓은 아파트 바다에 산들이 섬처럼 떠 있다. 북악, 인왕, 낙산, 남산, 아차산…. 퍼뜩 한병호의 그림이 떠오른다. 도봉산 기슭에 살던 작가 이상권이 쓴 글에 한병호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 ‘산에 가자’다.
“솔아, 아빠랑 산에 가자.” 화창한 가을날, 산기슭에 다닥다닥 들어선 고층 아파트 단지. 아빠와 어린 딸이 집을 나선다. “야, 날씨 한번 좋구나. 솔아, 오늘은 꼭대기까지 가 볼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금세 산책로가 나오고, 쉼터에서 운동하는 이들을 지나면 이내 산길이다. 아빠와 딸은 종알종알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가을 산을 한껏 즐기느라 걸음이 느리다. 곰 걸음으로 걷다가, 거북이 걸음으로 걷다가, 억새풀이 나오면 풀 화살을 만들어 쏘고, 예쁜 나뭇잎을 보면 주워서 가게 놀이를 한다. 청설모를 뒤쫓고, 새둥지를 구경하고, 바위에 별명을 지어 붙이고, 단풍나무 아래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밀조밀 아름답고 푸근한 가을 산, 알콩달콩 다정한 부녀의 모습에 보는 이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가을 산행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책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산 정상에 오른 아빠와 딸이 만세를 부른다. 빛 고운 가을 산에 이들이 서 있다. 그 산을 고층 건물, 고층 아파트가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다. 사방이 막혔다. 빨갛게, 노랗게 물든 산은 100만 적군에게 둘러싸인 장수처럼, 출렁이는 바다 위에 오뚝 솟은 섬처럼 아름다우나 애처롭다.
안산 전망대에서 누군가 그랬다. “에효, 저렇게나 집이 많은데.”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여전히 집이 부족할까. 세상엔 집을 집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가. 종부세와 보유세는 언제쯤 제대로 정비될까. 주택 정책은 언제쯤 제 길을 찾을까. 설마 저 아파트 바다가 출렁이다가 섬마저 몽땅 삼켜버리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집들이, 아파트가 산기슭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환영이 떠올라 몸서리를 친다. 저 포로들을, 저 섬들을 지켜야 할 텐데. 저들의 숨통을 틔워주어야 할 텐데.
잊지 말자. 이 도시에 산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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