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ㆍ1운동 100주년… 연해주ㆍ만주 독립운동유적지를 가다
한적한 명동촌 안내문구 요란… 동북공정 흔적 곳곳에 보여
지난달 24일 오후 러시아 우수리스크 사베스카야 언덕.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인근에 10가구가량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으나 언덕은 어른 허리 높이의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듯한 이 언덕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수많은 동료, 동포와 함께 일제에 학살당했다. 1920년 4월 어느 날이었다. 3ㆍ1운동 이후 한반도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항일투쟁이 연해주까지 번지자 다급해진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4월 참변이라는 서러운 역사가 깃든 곳이지만 사베스카야 언덕엔 추모 비석도 안내판도 없었다. 이날 이곳을 찾은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며 98년 전 숨진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내년은 3ㆍ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 사이 한반도는 태평양전쟁의 광풍에 휘말렸고,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자마자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에서 3ㆍ1 운동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뚜렷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또 다른 무대였던 연해주와 만주에선 한민족의 독립운동 흔적이 희미해져만 간다. 지난달 22~27일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의 주최로 찾은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아직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남아 있지만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나눔의 가치 실현한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연해주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정의와 자유 구현에 기반을 둔 기독교 신앙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항일투쟁의 전면에 섰다. 최재형을 비롯해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동휘 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는 최재형의 옛집이 있다. 붉은 벽돌 집을 철 울타리가 두르고 있다. 러시아인 소유였던 곳을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사들여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생가 안에 들어서면 별다른 안내 문구나 사료도 없이 텅 빈 공간이다. 한인들의 지도자였던 최재형의 지난날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최재형 옛집은 기념관으로 수리 중이라 한다. 지금은 입구에 매단 명패의 짧은 글만이 최재형의 흔적을 되짚고 있다. 최재형의 옛집도, 처형장소도 역사적 의의가 깊지만, 관리는 허술했다.
최재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노비로 태어난 그는 우연히 러시아 선장을 만나 지식인이 됐고, 1900년대 초 연해주 최대 거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어렵게 얻은 평안한 삶을 버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 조선인 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한인 신문 대동공보를 재발간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1920년 4월 일제는 최재형 집을 급습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체포했다. 최재형은 이튿날 사베스카야 언덕으로 끌려갔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3시간을 남서쪽으로 가면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만날 수 있다. 안중근은 최재형이 총장을 맡은 동의회 소속으로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크라스키노에서 손가락을 자르며 독립운동에 목숨 걸 것을 맹약했다. 광야에 세워진 검은 비석 상단에는 무명지가 잘린 왼손 모양이 새겨져 있다.
윤동주 낳은 명동촌,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
만주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1882년 최초의 한글 성서 ‘예수성교 누가복음’이 만주에서 발행됐다. 성경의 ‘GOD’이 하나님으로 불린 것도 만주 한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다.
독립운동가들의 고향인 중국 룽징시 명동촌은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큰 돌이 외지인을 맞는다. 마을은 한적한데, 윤동주를 기념하는 비석들과 안내 문구들이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듯 요란하다. 곳곳마다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중국의 역사로 은근히 묘사한 안내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안내문은 독립운동가의 활동 내용만 간략히 서술돼 있을 뿐, 한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윤동주 등이 다닌 명동학교는 새롭게 지었다. 전시관으로 꾸며 윤동주와 문익환 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었다. 깔끔하지만 옛 모습을 느끼긴 어렵다.
명동촌이 기독교의 중심이 된 건 명동학교 교사 정재면의 영향이 컸다. 정재면은 교사로 오는 조건으로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을 것을 요구했다. 유학자였던 마을 어른들은 논의 끝에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명동교회 설립 뒤 간도 지역에는 수많은 교회와 학교가 들어섰다.
윤동주의 생가는 명동학교 바로 옆에 있다. 집은 1932년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팔렸고,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현재 있는 집은 룽징시 인민정부가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에는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의 생가’라 적혀 있다. 다른 만주 유적지처럼, 민족성을 지키고자 했던 윤동주의 삶도 중국의 역사로 왜곡돼 있다. 만주의 모든 역사를 중국화하려는 동북공정의 흔적이다.
룽징시엔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비암산 일송정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독립의식의 상징이었다. 원래 있던 소나무는 민족정신을 해하려는 일제에 의해 1938년 말라 죽었다. 1990년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소나무가 죽어 다시 심기를 여덟 차례 반복해 2003년 심은 소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던 그 소나무는 아니지만 항일 정신을 전해 주긴 충분하다. 만주 탐방에 동행한 조선족 홍모(49)씨는 “늘 남의 나라에 산다는 소외감이 있었는데, 이번 탐방을 통해 내가 조상 땅을 지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소강석 이사장은 “우리 민족 역사를 잃어버리고 힘들게 흔적을 더듬는 것이 비극이지 않냐”면서 “이 문제를 회복하는 게 한국 교회와 후세대의 역할이지 않나 싶다”고 했다.
우수리스크ㆍ룽징=글 사진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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