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아이돌ㆍ유튜버 보며
'화장한 남자'에 거부감 줄어
한 반에 2,3명 화장하고 다녀
“예전에는 친구들한테 ‘못 생겼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지금은 화장하고 나가면 귀엽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나중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돼서 저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서울에 사는 고교 3학년생 정모(18)군은 6년 전 처음 화장을 했다. 집에서 누나 3명의 화장을 구경하다가 조금씩 따라 해봤다. 처음엔 피부톤을 고르게 정돈해주는 비비크림만 발랐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눈썹을 그리고 색조화장도 했다. 반응은 차가웠다. ‘남자가 무슨 화장을 하느냐’는 놀림은 기본이었고, 모르는 또래 친구들이 길에서 심한 욕설을 하며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나도 화장 한 번 해달라’고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학교 선생님들도 ‘오늘 화장 잘 먹었다’고 얘기해주시기도 하고요.”
경기 고양시에 사는 고교 3학년 오모(18)군은 초등학교 때부터 화장을 했다. 오군 역시 누나가 화장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이 신기해 누나 화장품을 써보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만 해도 “쟤는 뭔데 화장을 하고 다니냐, 게이냐”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화장의 매력에 빠져 특성화고 뷰티디자인학과에 진학했고, 메이크업 국가기술자격증까지 땄다. 이젠 같은 반 남자 친구 대부분이 피부와 눈썹 화장을 하고, 여자 친구들은 오군에게 “신상 파운데이션 써봤냐, 새로 나온 립스틱은 어떤 색깔이 예쁘냐”고 물어볼 만큼 남녀 경계도 없다. 여드름성 피부인 오군은 “대학에서 화장품학을 전공해 예민한 여드름성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화장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화장? 개인취향이죠.”
소년들이 화장에 빠졌다. 여학생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입술에 틴트를 바르며 화장에 입문할 때도, 20,30대 남성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비비크림으로 조심스레 화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도 늘 화장의 세계 바깥에 있었던 10대 남학생. 사실 이들이 처한 시공간은 특수하다. 아직 헤어스타일조차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학교라는 보수적인 공간, 여학생들의 화장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생님, 남의 시선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10대의 자아까지.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그 어느 세대, 성별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울퉁불퉁 여드름 피부와 생기 없는 입술, 시커먼 코 피지와 넓디 넓은 모공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화장은 사회적인 관행, 성별을 뛰어넘는 ‘개인 취향’일 뿐이니까.
화장을 하는 이유도, 소신도 제 각각이다. 지난해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한 서모(17ㆍ경기 파주시)군은 “입술에 생기가 없으니 틴트를 한번 발라보라”는 친구의 권유로 화장을 시작했다. 지금은 눈을 돋보이게 하는 섀도우와 볼에 입체감을 더하는 블러셔까지, 안 해 본 색조화장이 없다. 가장 아끼는 화장품은 블러셔 팔레트. 서군은 ‘남자다운 화장’에도 반대한다. 그는 “남자 메이크업은 여자보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편견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시에 사는 전모(16)군에게 화장은 예술이다. 화장을 하면 미술 활동처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같아 재미있다고. 전군은 “아직도 안 좋게 보는 친구들도 있지만, ’자기 관리를 잘 하는 것 같다’고 해주는 친구들도 많아서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에 따르면 화장을 하는 남학생은 한 반에 2,3명 꼴. 10명 중 1명은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화장을 하고 다닌다. 비비크림을 바르고 눈썹 화장을 한다는 김모(18ㆍ서울)군은 “대부분 비비크림을 발라 피부를 정돈하는 정도”라며 “화장을 하는 남학생 중 1,2명은 색조화장도 한다”고 말했다.
◇ 뷰티학과 남학생 비율 15% 넘어
이들이 처음 화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대부분 누나나 엄마 등 주변사람을 통해서였지만, 본격적으로 화장기술을 배운 건 유튜브다. 남성 유튜버들의 화장 동영상을 보면서 화장에 대한 편견이 차츰 옅어졌고, 그 자리엔 자신감이 들어찼다. 방탄소년단 등 걸그룹 못지 않은 색조 화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남성 아이돌을 보며 ‘화장한 남성 얼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화장을 즐겨 한다는 한 남학생은 “예전에는 화장한 걸 숨기려고 했지만, 요즘에는 내가 화장을 잘 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티가 나게 화장한다”고 말했다. 김주덕 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교수는 “과거 권위적이며 강한 남성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남성 이미지를 사회적으로 선호하게 되면서 자신을 가꾸는 남성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장에 대한 10대의 관심은 진로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경대 뷰티미용학과는 10년 전만 해도 남학생의 비율이 정원의 3,4%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5~20%나 된다. 예전에는 메이크업을 전공해도 자신은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는 남학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학생 수도 많이 늘었고 다들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화장하는 남성의 증가는 화장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다. 국내 남성 화장품 시장 규모는 1조2,000억원(영국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조사ㆍ2016년 기준)으로, 세계 최고수준이다. 남성 화장의 확대는 전문가들도 놀라워할 정도다. 신세영 서경대 뷰티미용학과 교수는 “몇 년 전 육군사관학교에 메이크업 관련 특강을 갔는데, 남학생들이 아이라인 등 포인트 메이크업에 대한 질문을 하는 등 여학생들보다도 화장에 관심이 많아 깜짝 놀랐다”며 “메이크업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더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전히 사회적 시선이 따가울 때가 많다. 화장을 하는 또 다른 남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말이 가장 싫다”며 “화장하고 염색한다고 학생이 아닌 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화장이 성정체성 문제를 일으킨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이들은 “성에 따라 정해진 외모와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선입견”이라고 항변한다.
신세영 교수는 “얼굴에 여드름이 있다고 머리카락으로 억지로 가리고 다른 사람 눈도 못 쳐다보는 10대들이 있는데, 이럴 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다”며 “화장이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존감 회복의 기능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의 화장을 무조건 막기보다 올바른 화장품 사용법과 클렌징법 등을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김가현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