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경북 의성 ‘탑리버스정류장’ 김재도 대표… 부친 이어 68년째 가업
13일 오전 10시20분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버스정류장 앞에는 동네 주민 조병숙(70ᆞ여) 씨가 대구 가는 버스표를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매표원 아주머니는 몸이 아파 집에 누워 있었고, 남편이 대신 매표소 열쇠를 들고 나온 터였다. 하루 상ᆞ하행선이 각각 6회뿐이어서 매표원이 굳이 종일 근무할 필요 없이 출발 시각 전에만 잠시 나오면 됐다.
조 씨는 40년 정류장 단골손님이다. 1978년 대구서 시집인 의성으로 이사온 후 한 달에 1, 2번은 꼭 친정 나들이를 하고 있다. 조 씨는 “탑리버스정류장은 대구 친정과 의성 시집을 이어주는 존재”라며 대구행 10시28분 버스에 올라탔다.
탑리버스정류장은 6ᆞ25 한국전쟁의 난리통인 1951년 생겨났다. 대구의 큰 장인 서문시장과 의성을 시외버스로 이어온 지 68년째다. 지금 같으면 1시간 남짓한 거리를 6시간 가까이 돌아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마차나 걷는 것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설과 추석 명절 때면 고향을 찾는 인파로 정류장이 미여 터졌다. 동네 사랑방이 따로 없었다. 서민들의 애환과 사연이 곳곳에 배어있는 이곳도 세월 앞에서는 버티기가 쉽지 않다. 꿈을 먹고 자란 탑리버스정류장은 이제 추억이 되고 있다.
김재도(81) 탑리버스정류장 대표에게 정류장은 그의 인생 자체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54년 아버지 김채환(당시 46세) 씨가 돌아가시면서 정류장은 6남매의 장남인 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해 평생 정류장을 지켜온 그는 “내가 살아있는 한 정류장은 계속 굴러갈 것”이라고 말했다.
탑리버스정류장이 생겨나기 전 의성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다. 큰 장을 보기 위해 대구를 갈 때면 새벽별을 보며 마차를 타고 가서는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것도 70㎞ 남짓한 지름길을 서둘러 달렸을 때 얘기다.
시외버스가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돌입한 1951년부터다. 대구여객이란 이름의 회사가 대구 대신동 서문시장 입구에 정류장을 차려놓고 의성을 잇는 시외버스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외버스는 의성으로 곧바로 질러오는 대신 경산의 하양과 와촌, 영천 청통, 신녕, 군위 의흥을 거쳐 탑리로 돌아오는 우회로를 달렸다. 팔공산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오다 보니 꼬박 5시간30분이 걸렸다.
대구여객이 의성에서 정류장 업자를 물색했지만 선뜻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번거롭고 힘들기 때문이었다.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 김 대표의 아버지가 손을 들고 나서면서 정류장 가업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시외버스 한 대가 대구와 의성을 오갔다. 오후 1시쯤 대구를 떠나면 탑리에는 오후 6시30분쯤 도착했다. “버스기사와 조수, 차장이 한 조로 움직였는데 이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정류장업에 포함됐다”는 김 대표는 “당시 부엌 한 칸에 방이 두 개였는데 기사와 조수는 아버지 남자 형제와 같이 잤고, 차장은 어머니 여동생과 한 방을 썼다”고 말했다.
탑리에서 밤을 보낸 버스는 다음날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대구로 출발했다. 기사와 차장 등이 김 대표 어머니가 차린 밥상을 비우는 동안 버스를 예열하는 것도 가족들의 일이었다. 부동액 대신 끓는 물을 냉각기 라디에이터에 부어 넣고 시동도 미리 걸어놨다.
시외버스 매표소와 구멍가게는 같은 공간이었다. 서문시장에서 국수와 과자, 사탕 등을 사다 팔았다. 인근 기름집에서 석유를 말로 사와 100분의 1인 홉으로 팔면 양을 좀 남길 수도 있었다. 인근 제재소에서 나무껍질을 벗겨와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정류장이 자리를 잡아가던 1954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등질 때 김 대표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홀어머니와 3남3녀 중 장남이다 보니 사실상 가장이 됐다”는 그는 “가업으로 물려받은 버스정류장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잠시 허공에 시선을 멈췄다.
아버지 교육열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면서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10㎞가 넘는 거리의 의성공고를 매일 4시간이나 걸어서 등ᆞ하교한 덕분에 무사히 졸업장을 쥐게 됐다.
대학은 대구에 있던 청구대 토목학과에 다녔다.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다니면서 주말과 공휴일에는 하루도 대구에 머물지 않았다.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였다. “정류장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시외버스 요금이 공짜”라는 그는 수업만 마치면 서문시장으로 달려가 버스에 몸을 싣곤 했다.
군대도 갔다 오고 대학도 졸업한 그는 잠시 갈림길에 서게 됐다. 국토개발이 한창이던 1963년 무렵 토목학과 졸업생을 찾는 현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이 눈에 밟혔다. 그는 결국 고향을 선택해 평생 의성을 지키게 된다.
대학생이 손가락을 꼽던 금성면에서 그는 착실히 정류장을 꾸렸다. 1976년에는 좁아 터진 정류장을 지금 자리로 옮겼고, 대구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곳 탑리를 지나 의성읍과 안동, 청송으로 뻗어나갔다. 1981년에는 버스 10대가 동시에 설 수 있는 규모로 정류장이 커졌고 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대합실도 생겼다. 주변에는 덩달아 식당과 다방, 술집, 상가 등이 들어섰다.
“시외버스가 황금기였던 1980년대에는 하루에 학생 500명, 일반 500명 등 1,000명이 탑리에서 버스를 탔다”는 김 대표는 “매표 기준으로 탑승객이 1,000명 안팎이었으니 하차 손님까지 합치면 하루 2,000명이 정류장을 이용한 셈”이라고 말했다.
설이나 추석 명절 때면 버스는 귀성객들로 넘쳐 났다. “버스 앞뒤로 난 2개의 문으로 손님을 짐짝 싣듯 밀어 넣고 나면 차장이 서 있을 공간조차 없었다”는 김 대표는 “신발을 벗은 차장이 좌석 등받이를 밟고 다니면서 차표를 확인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76년에는 한국청년회의소 금성면지회장, 군정 자문위원, 검찰청 선도위원도 지냈다. 1985년에는 임기 3년의 금성농협조합장에 당선돼 재선까지 지냈다.
정류장 덕분에 누나와 동생들이 공부 마치고 가정을 꾸렸고, 김 대표의 자녀 4명도 터를 잡았지만 승차권의 10%인 수수료 수입으로는 큰 돈이 남지는 않았다. 할인이 적용된 학생표는 500명어치를 팔면 한달에 30만원 정도로 당시 매표원 월급 60만원의 절반에 그쳤다.
1990년대 초반 한 시내버스 회사가 수수료를 내지 않으려다 결국 정류장을 떠난 일은 두고두고 가슴이 아프다. “정류장에서 버스회사와 손님들이 주차장과 대합실,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승차료에서 조금 뗀 것인데 막상 시내버스가 떠나버리자 정류장이 쫓아냈다고 알려져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1990년대 고속버스와 열차가 대중화하고 자가용 보급이 크게 늘면서 시외버스 탑승객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지금 탑승객은 하루 20명 수준이니 전성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김 대표는 “한 달에 30만원 정도에 불과한 매표 수입과 지자체 지원액을 더해 매표원 아주머니 월급을 주고 나면 손익계산서가 제로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 동안 몇 번이나 폐업신고서를 들고 군청을 찾아갔지만 “정류장이 사라지면 승객들이 눈비 맞고 기다려야 한다”는 만류에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손해는 볼 수 없는 노릇이라 매표원 급여 일부를 지원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정류장의 미래는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다. 23일이면 하루 각 6회의 상ᆞ하행선이 절반인 각 3회 운영으로 줄어든다. 승객이 없다는데 따로 할 말은 없지만 주민들의 사랑방이 잊혀져 가는 것은 못내 아쉽다.
김 대표는 “단골 승객 중 대다수는 대구의 병원을 오가는 노인”이라며 “승객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정류장 문을 닫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성=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동영상 보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