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성산서 '빛의 벙커:클림트'전
황금빛 ‘키스’ 등 눈과 귀 사로잡아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화려한 황금빛이 컴컴한 벙커를 환하게 물들였다. 높이 5.5m, 2,975㎡(900평) 규모의 벙커 내부 벽은 온통 황금빛의 화려한 장식과 문양이다. 클림트의 관능적인 여성들이 물감이 번지듯 등장하고,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흘러간다. 풍성한 색채로 자연을 그렸던 클림트의 풍경화는 마치 붓이 춤을 추는 듯 관객의 눈 앞에서 움직인다. 웅장하고 극적인 바그너의 오페라와 베토벤의 교향곡이 거장의 작품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빛의 벙커: 클림트’ 전시가 16일부터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의 옛 국가기간 통신 벙커에서 열린다. 2012년 프랑스 남부 레보드프로방스의 폐채석장을 개조해 선보이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빛의 채석장’과 파리의 ‘빛의 아틀리에’에 이어 세 번째 ‘아미엑스’(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ㆍ예술과 음악 몰입형 체험) 전시가 제주에서 열리게 됐다. 프랑스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미엑스는 광산, 공장, 발전소 등 산업 발전으로 버려진 장소에 빔 프로젝트와 스피커를 설치해 미술 작품을 영상으로 투사하고, 그에 맞는 음악을 입혀 감상하는 새로운 예술 장르다. 관객은 전시공간을 자유롭게 거닐며 시각ㆍ청각ㆍ공감각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클림트 작고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상에는 ‘키스’와 ‘유디트’ 등 그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품과 ‘양귀비의 언덕’, ‘처녀’ 등 풍경화와 초상화 750여점이 사용됐다. 이들 그림을 변형한 이미지 수는 2,000점에 달한다. 배경음악은 12곡이 사용됐다. 영상과 음악은 100여개의 빔 프로젝트와 스피커를 통해 30여분간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빈 출신 작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의 동화 같은 작품들로 구성된 영상도 10분간 이어진다. 나선형의 소용돌이, 바다에 잠긴 대도시를 유영하는 고래, 도시를 떠 다니는 유람선, 떨어지는 빗방울 등이 입체적으로 다가오면서 관객을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전시가 제주로 오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전시를 유치한 모바일 티머니업체 티모넷의 박진우 대표는 “교통카드와 스마트폰의 접목을 통해 생활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며 “이제 IT와 예술을 접목한 문화기술 서비스를 차세대 전략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유학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줄 서서 ‘모나리자’를 보고 이게 왜 유명한지 알 수 없었다”며 “작품을 잘 알지 못해도 예술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미엑스는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고 설명했다.
전시 공간을 찾으려 전국 방방곳곳을 뒤졌지만 정부 소유 등 여러 제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찾은 이곳은 1990년 한국과 일본, 한반도와 제주 사이에 설치된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국가 통신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군사시설로 분류돼 병력도 주둔했지만 2000년대 폐쇄된 후 민간에 매각됐다. 벙커 주변에는 위장용 페인트와 철문과 방호벽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박 대표는 “빛과 소리가 완벽하게 차단되고, 내부가 사계절 평균 16℃로 유지되고, 높이가 5m가 넘는 등 작품을 선보이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고 했다. 1층 단일 건물인 벙커는 위로 삼나무가 뒤덮여 있고, 작은 출입문 두 개만 드러나 있다.
전시는 10년간 아미엑스를 선보여 온 프랑스 컬처스페이스와 티모넷이 함께 운영한다. 클림트 전시는 내년 10월 말까지 열리고 이후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등 거장들의 전시가 이어진다. 한국 작가들과도 영상 제작을 논의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인구 1만5,000명에 불과한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 최근까지 연간 80만명이 찾아 전시를 관람했다”며 “이번 전시가 도시재생과 함께 관광객 유치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귀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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