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 상태로 정치를 떠나길 원치 않는다. 권력을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잘 안다. 때가 되면 물러날 것이다.”
2005년 11월 22일 동독 출신 첫 여성 독일 총리에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당시 51세)은 늘 ‘아름다운 퇴장’을 맘에 품었다. 당시만 해도 이 무명의 여성 리더가 4선 고지에 오르며 13년간 장기집권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오히려 BBC는 메르켈이 이끄는 우파 성향 기독민주당(CDU)이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과 대연정을 이뤘지만 노선 차이로 국정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불편한 동거’가 될 것이라며 험난한 정치 여정을 우려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실용주의자였다. 한쪽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열린 사고와 포용의 리더십으로 원전 폐쇄, 최저임금 도입 등 좌파 진영의 숙원사업까지 끌어 안으며 상생의 정치로 전성기를 누렸다.
때로는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중한 태도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명확한 의견이 없다’는 뜻의 ‘메르켈하다(merkeln)’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정치 비평가들은 메르켈이 권력 유지를 위해 연정에만 목을 매다 정작 자신의 정치 기반은 돌보지 못하는 자충수를 뒀다고 지적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메르켈이 빠르게 좌클릭 하면서 메르켈이 속한 보수정당은 길을 잃었고, 지지자들은 떠났고, 그 결과 극우 성향의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토양을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난민 문제로 혼란과 분열이 커지는데도 유화적 난민 정책을 고수한 게 대표적이다.
반면 밖에서는 승승장구했다.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와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유럽 단결에 앞장서 입지를 다졌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장 이후엔 자국 우선주의와 포퓰리즘에 맞서는 전세계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지난달 말 그는 잇따른 지방선거 패배로 당 지지율이 급락하자, 차기 총선과 기민당 대표 선거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주어진 총리 임기(2021년 9월)까지는 마치겠다고 했지만, 실제 다 채울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다.
메르켈이 퇴장하면 유럽의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란 우려들이 나온다. 가디언은 “독일에서 극우와 국수주의가 부상하고, 서구 자유주의동맹 역시 흔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를린시민 칼헤인즈 펠케(60)씨는 “마음이 반반이다. 메르켈이 없는 새로운 정치를 원하지만, 메르켈이 없는 정치는 또 불안하다”고 했다. 메르켈 시대의 종언으로 독일과 유럽, 세계 정치가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를 참이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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