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청소년, 혐오 내면화 징후 보여
학교 안팎 풍토가 혐오 조장 소지 다분
잔인한 경쟁 걷어내고 시민교육 힘써야
사회 곳곳에 혐오가 넘쳐나고 있다. 만연한 왕따 현상에서 엿볼 수 있듯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의 학교가 혐오의 감정이 싹을 틔우고 뿌리 내리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살벌한 경쟁과 각자도생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공감과 배려를 내면화하여 실천하길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지난 7월 필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청소년 인식을 조사했다. 조사 대상은 전국에서 대표성 있게 표집된 중ㆍ고등학생 4,000명이었다. 조사 결과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청소년이 특정 사회적 약자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 됐다. 우연이 빚어낸 결과로 치부하기엔 드러난 징후가 무척 일관성 있고 선명했다.
이상 징후는 사회적 배려와 보호가 필요한 대표적 사회적 약자로 간주되는 장애 학생이나 보육시설 거주 청소년에 대해 대다수 학생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내비친 학생들의 응답에서 포착됐다. 장애를 가졌거나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을 사회적 약자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들 대다수는 완곡한 부정이 아닌 절대 부정을 택했다. 장애 학생이 사회적 약자에 포함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 학생들 절대 다수는 보육원 거주 청소년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조사 대상 중ㆍ고등학생 가운데 20% 정도가 장애 학생이나 보육원 거주 청소년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견해를 드러낸 학생들의 속내를 정확히 헤아리긴 어렵다. 다만 대다수 학생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선 학생들이 장애 학생과 보육원생을 ‘싫어할 만한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부 청소년의 내면세계를 지배하고 있을지 모를 혐오의 감정에 대해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저서 ‘혐오사회’에서 혐오는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고 설파했다. 혐오는 느닷없이 우발적으로 분출하지 않으며 훈련과 축적의 과정을 거쳐 확신을 바탕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네 가정과 학교는 경험적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겨냥해 혐오 감정을 키우면서도 그에 대한 자기비판에는 한없이 게으른 괴물 같은 청소년이 대거 등장하기에 적합한 풍토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서 일부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특정 계층 자녀와 어울리는 걸 차단하기 위해 아파트 통로를 봉쇄하고 담장을 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선 집값 하락을 우려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장애 학생 학부모의 모습이 목도되기도 한다. 학교는 또 어떤가. 그간 학교는 학부모와 학생의 사회이동 욕구를 충족하는 데만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오랫동안 잔인하고 피를 말리는 경쟁에 내몰려야 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청소년은 과연 무엇을 배우고 내면화했겠는가.
혐오는 불특정 다수와의 접촉에 수반하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방략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저서 ‘차별 감정의 철학’에서 혐오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 주위에서 이상한 사람을 찾아내 고발하는 데 능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스스로는 이상하거나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혐오의 시대를 맞아 우리 청소년이 공존과 연대에 눈을 뜨게 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자신이 정상임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과도하고 잔인한 경쟁을 걷어내고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해야 한다. 아울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세상엔 처음부터 누군가가 싫어할 만한 사람보다는 까닭 없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누구나 싫어할 만하게 된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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