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4>장시성 휘주문화 우위엔 ②리컹에서 옌촌까지
이학명촌(理學名村)으로 알려진 리컹(理坑)은 여(餘)씨 집성촌이다. 진사 16명, 7품 이상 관원 36명, 문인 학사를 92명이나 배출했다. 산골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으니 예부터 자칭 ‘서향(書鄕)’이었다. 시조인 여도잠은 1118년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의 아버지 주송과 함께 진사에 등과한다. 두 사람은 모두 우위엔(婺源)이 고향이다. 푸젠성 여우시(尤溪) 현위로 재직할 때 태어난 주희는 사당이 있는 우위엔을 자주 찾았으며 큰 발자취를 남겼다.
높은 담장과 좁은 골목, 우위엔은 휘주 마을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새로 산 자전거를 자랑하듯 타는 아이, 아치형 문을 따라 마을 구경을 하는 사람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학생들도 보인다. 사마제(司馬第)는 청나라 초기 벼슬을 한 여위추의 저택이다. 편액 아래 ‘손자병법’을 새겼다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벽돌에 묻은 흙 때문인지 병법 공부하긴 어려워 보인다. 350년이 지났지만, 고관저택의 풍모가 남았다.
◇관원의 저택, 상인의 집
천관상경(天官上卿) 대문은 편액과 벽돌이 좀 부자연스럽다. 명나라 시대 이부상서를 역임한 여무형의 저택이다. 명나라는 재상을 두지 않고 6부만 설치했다. 이부가 가장 높은 지위라 천관이라 불렀다. 지위에 맞게 화려한 석조나 전조가 있었을 터인데 500년 세월이 무상하다. 명나라 시대 공부상서까지 오른 여무학의 상서제(尚書第)도 있다. 청나라 시대 상인 여현휘의 저택 이름은 이유당(詒裕堂)이다. 상인과 관료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숭덕당(崇德堂), 이훈당(彝訓堂)도 모두 상인이 지은 집이다.
가장 흥미로운 저택은 소저루(小姐楼)다. 소저는 아가씨라는 뜻이다. 휘주 상인의 건축양식을 지닌 저택인데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니 의외다. 100년 조금 지난 목조건물에 최근의 흔적이 많은데, 용을 쫓는 봉황 한 쌍이 새겨진 목조는 남아 여전히 소저루를 빛내고 있다. 후원으로 나가니 2층 건물 창문이 열려 있고 살짝 비스듬하게 않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기대 앉아서 자수를 뜨면서 바깥 공기를 마시는 공간인데, 이를 메이런카오(美人靠)라 부른다. 중국 남방의 목조건물에 많다.
도랑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얀 수구탑도 점점 빛을 잃고 있다. 다리를 오가는 사람도 점점 줄어든다. 휘주마을이 밤으로 내달리나 싶더니 갑자기 홍등이 불을 밝힌다. 홍등은 도랑으로 서서히 내려와 물속에 잠긴다. 복이며 재물인 물은 마을 밖으로 흐르지 않고 밤새 머무르며 붉게 빛나고 있으려나 보다.
◇800년을 굳건히 견딘 뱃머리 돈대
다음날 30여 분을 달려 칭화진(清華鎭)에 위치한 채홍교(彩虹橋)를 찾았다. 채홍은 무지개라는 뜻이다. 지붕이 있는 복도를 갖춘 구조로 랑교(廊橋)라고 부른다. 휘주에서 가장 오래됐으며 가장 긴 다리다. 길이는 105m이고 폭은 5m로 넓은 편이다. 800년 세월을 견뎌온 굳건한 다리다. 돈대를 네 군데 설치했는데 육중한 바위를 쌓아 뱃머리 형태로 만들었다. 홍수가 잦아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물길로부터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침 비가 쏟아지고 강물은 다리 중심을 건드리지 않고 유유히 지나는 듯하다.
다리는 강을 건너는 목적 외에, 지붕이 있어서 모임 장소이기도 하다. 다리 곳곳에 정자가 마련돼 있다.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도 있어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장기를 둬도 된다. 다리 중심에는 장홍와파(長虹卧波) 사당도 있다. ‘커다란 무지개가 파도를 잠재운다’는 의미로 보인다. 감실에는 치수의 상징인 우왕(禹王)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양 옆에는 스님 행색의 호제상(胡濟祥)과 선비 차림의 호영반(胡永班)이 협시하고 있다. 스님은 채홍교를 짓는데 자금 조달을 담당했고 선비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책임을 맡았다.
채홍교를 지나는 강을 따라 남쪽으로 20분 내려가면 쓰커우진(思口鎭)이다. 이곳에는 1km 정도 거리를 두고 800년 역사를 지닌 두 마을이 있다. 안쪽에 있는 쓰시(思溪)와 입구 쪽 옌촌(延村)이다. 휘주문화 지역을 여행할 땐 우위엔에서 210위안(약 3만5,000원)짜리 연표(聯票)를 끊는 게 유리하다. 휘주마을을 포함해 모두 14곳을 5일 동안 둘러보는 데 유효한 입장권이다. 물론 가고 싶은 곳만 별도로 사도 되지만, 각각 60~120위안에 이르니 통합권보다 훨씬 비싼 편이다. 이런 저렴한 티켓 제도를 만든 사람을 칭찬해주고 싶다.
◇목숨 수(壽) 서체가 100개인 백수화청
쓰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통제교(通濟橋)도 돈대는 뱃머리다. 어른과 아이 모두 나와 다리 위에서 논다. 가게도 있고 찻집도 있다. 낯선 방문객이 등장하니 아이들은 즐거운 재롱잔치다. 촉촉하게 젖은 골목을 따라 마을로 들어간다. 친절하게 화살표로 알려주는 ‘유람순서’를 따라간다. 활짝 대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보니 상갓집이다. 한 아이가 노란 종이 위에 먹물 묻힌 목판으로 느릿느릿 소지전(燒紙錢)을 찍고 있다. 고인이 누구인지 모르나 의젓하고 침착하게 노잣돈을 발행한다. 장례식 때는 물론이고 청명이나 기일에 소지전을 태우는 모습은 오늘날도 자주 볼 수 있다.
3품 벼슬인 대부(大夫)를 하사 받은 유사영의 조거(祖居)인 진원당(振源堂) 앞에 도착했다. 아편전쟁 후 유씨 집안은 비분강개해 후대 양성에 매진했는데 손자인 유사영이 차와 목재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나라에 기부했다. 그 공로로 벼슬도 받았다. 서태후에게 벼슬을 받은 상인은 ‘최고의 휘주상인’으로 알려진 호설암만이 아니었다. 문당(門堂) 사이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성지(聖旨)는 아무나 새기지 못한다. 지붕을 열어둔 천정(天井)이 있어 거실은 밝다. 마을 전체가 관광지이니 집도 다 개방하고 차나 공예품을 판다. 100년 전의 영화를 안고 있는 고풍스러운 찻집이 된 셈이다.
담장에 ‘유람순서’ 화살표가 보인다. 직각으로 꺾지 않고 부드럽게 평면으로 만든 벽이다. 행인에 대한 배려이고 큰 물건을 옮기기 쉽게 하려는 목적이다. 휘주 마을에만 보이는 인간미라 할 수 있다. 골목을 따라 더 들어서면 백수화청(百壽花廳)과 만난다. 원래 손님을 맞이하는 승지당(承志堂)인데 목숨 수(壽)자를 서로 다른 서체로 100개를 새긴 대청이란 뜻으로 부른다. 유리로 단단히 보호하고 있어 ‘귀중한’ 목숨을 떼가긴 힘들다. 공간이 좁아 100개 모두를 한 컷에 담기 어렵다. 사실 문에는 99개 밖에 없다고 한다. 나머지 1개는 건물 자체가 ‘수(壽)’자 구조로 지어졌다. 모 방송국에서 공중 촬영을 해서 확인했다고도 한다. 이제 드론을 가지고 발품기행을 다녀야 할까.
◇휘주 인문정신이 살아있는 유교 상인
유씨 집성촌 쓰시 마을에는 은고(銀庫)가 있다. 청나라 중엽에 만들어진 은자 창고다. 여기 은자는 오로지 교육과 다리 건설, 기아 구호과 재난 구원에만 사용했다고 하니 휘주문화의 민심을 배워야 할 듯싶다. 쓰시의 별칭이 왜 유상제일촌(儒商第一村)인지 은고만 봐도 알 수 있다. 거실 큰 항아리에 투명한 물이 가득하고 물속 도자기 주위에 동전이 수두룩하다. 물을 통과해 도자기 안에 동전을 기부하려면 꽤 신경을 써서 던져야 한다. 은고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사람이 많아 가만히 앉아서도 돈을 번다.
별처럼 생긴 유홍초가 멋지게 폈다. 비가 내린 덕분인지 분장대와를 배경으로 활짝 꽃잎을 드러냈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품은 집은 화이헌(花頤軒)이다. 말 그대로 ‘꽃이 피는 집’인데 마을 노인이 꽃과 풀을 심고 휴양하는 공간이다. 대문에 거울이 하나 붙어 있다. 속설이지만 귀신이 자기 모습에 놀라 도망가도록 한다. 덕분에 거울 속으로 정원과 하얀 담장이 쏙 들어왔다.
마을을 나와 옌촌으로 간다. 원래 이름은 옌촨(延川)이었다.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개울물처럼 자자손손 백세까지 오래 이어지라는 뜻이다. 마을 이름과 딱 어울리는 기념비가 벽화처럼 새겨져 있다. 누렇게 바랜 벽에 부모 이름과 생몰 연도, 행적 등이 기록됐다. 묘비명과 다르지 않다. 빨간 글자로 백부를 위한 기념비도 새겼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백세명수(百歲冥壽) 비문이다. 백세까지 건강하게 살자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명절에 여행지에서 제사 지내고 기일 챙기기도 바쁜 세상이다. 우리도 이런 좋은 풍습은 배워보면 어떨까. 아무 벽에나 새기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옌촌은 담벼락엔 거무튀튀한 ‘세월’이 많이 묻었다. 치장하지 않은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어서 보기 좋다. 사람도 별로 없어 한산하다. 물통을 메고 가는 사내가 멀리 골목을 벗어난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니 살림살이도 그대로 보인다. 공동 우물은 창살처럼 막았는데 물어 보려야 사람이 없다. 집집마다 거울이 붙었다. 거울 속에 가위가 보여서 살짝 궁금해진다.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분명 가위다. 모르긴해도 귀신은 가위도 무서운 게 확실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다가 뒤를 돌아본다. 폐가 하나가 눈에 밟힌다. 회백색 담장과 때깔 좋은 기와는 세월을 따라오다가 주인이 떠나고 온기가 사라지니 넝마처럼 변했다. 그래도 심안이 있어 화려했던 휘주문화를 기억해주는 여행객이 있다면야 이대로 늙어가면 또 어떠리. 그림을 배웠다면 오래 앉아 도화지 위에 담백한 색감으로 고치지 않았을까? 세월의 풍파를 이긴 멋진 노익장처럼 말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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