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은 2004년 본격화했지만, 조짐이 뚜렷해진 건 2000년 12월이다. ‘카세트 스캔들’ 혹은 ‘쿠츠마 게이트’라 불리는 레오니드 쿠츠마(Leonid Kuchma) 대통령의 발언 도청 테이프 폭로 사건이 터졌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친서방(유럽) 개방화 기조 속에 비교적 안정적인 번영과 근대화를 이뤘지만, 정치는 구소비에트 출신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되며 국가 경제의 사유화와 부패로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정치ㆍ경제 권력 중심의 파벌적 네트워크를 견제할 시민사회는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고, 주류 언론은 구소비에트에 버금가는 통제와 검열 속에 질식해갔다.
정부 비판적 논조의 매체 ‘우크라이나 프라브다’를 설립ㆍ운영하던 31세의 저널리스트 게오르기 곤가제(Georgiy Gongadze)가 2000년 9월 실종됐다가 11월 3일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 불과 20여일 뒤인 그해 11월 28일, 당시 야당이던 우크라이나 사회당 정치인 올렉산드르 모로즈(Oleksandr Moroz)가 곤가제의 납치ㆍ살해에 쿠츠마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담긴 쿠츠마의 발언 녹음 테이프를 공개했다. 쿠츠마의 사임 및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녹음을 한 이는 대통령 경호부대 간부였던 미콜라 멜니첸코(Mykola Melnychenko)였다. 그가 비밀 녹음한 500여시간 분량의 테이프에는 쿠츠마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하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부에 레이더 장비 등을 수출한 사실 등 외교적 스캔들을 비롯, 다양한 불법ㆍ비리 정황들이 담겨 있었다. 쿠츠마는 당연히 그 사실을 부인하며, “내 목소리가 포함된 건 맞지만, 내용은 모두 편집ㆍ조작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 일로 친서방 외교무대에서 홀대받던 그는 독립 이후의 외교노선을 선회, 푸틴 체제의 러시아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는 2004년 오렌지 혁명 여파로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후임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과 연대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아주 잃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 검찰이 쿠츠마를 권력남용 등 혐의로 기소한 건 2011년 3월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테이프의 증거 채택을 거부한 채 그와 곤가제 피살 사건을 연결 지을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각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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