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0>데뷔 30년 뮤지션 이상은
고3 소녀에게 어두운 밤, 강당은 구원이었다. 쳇바퀴 같은 입시 준비에 숨이 막힐 때마다 창문을 넘어 그곳에 들어갔다. 혼자만의 무대에서 그는 휘트니 휴스턴도 되고 마돈나도 되었다. ‘아, 시원하다!’ 바다의 청량감, 가슴이 탁 트이는 해방감을 그때 맛봤다.
‘담다디’로 대학 1학년 때 오른 아이돌의 자리. 열여덟에게 한국의 ‘스타 시스템’은 감옥이었다. ‘못해요’가 허용되지 않는 극심한 경쟁에 내몰렸다. 학교의 강당 같은 ‘산소호흡기’도 없었다. 노래는 더 이상 행복이 아니었다.
‘번아웃, 과부하, 방전, 트라우마.’ ‘담다디의 시절’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이러하니, 이상은(48)이 인기 절정의 때 훌쩍 떠난 이유가 짐작됐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옥죄는 시스템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기보다, 그는 다 버리고 사는 길을 택했다.
이미 ‘글로 배운’ 인기의 허망함도 선택을 부추겼다. “고등학교 때 읽은 인터뷰 기사에서 그룹 ‘아하(A-Ha)’가 이런 말을 했죠. 인기란, 바늘을 들고 있는 사람들 위에서 풍선을 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덕분에 인기의 위험한 이면을 알고 있었어요.”
탈출구 뉴욕에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거기서 진짜 가고 싶은 길을 찾았다. 그건 공장에서 찍어내는 가수가 아닌, 실험하고 창작하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였다. 강당의 무대에서 홀로 노래를 부를 때의 시원함을 다시 느꼈다.
데뷔 이래 이상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나를 잃고 인기를 얻는 건 그에게 무의미했다.
“자기를 지킬 수 없을 때 번아웃이 오는 거잖아요. 그럴 땐 떠나야 자기를 발견할 수 있죠. 어렸을 때 ‘담다디 (시절)’ 같은 개고생을 하면 누구라도 일찌감치 철학자가 돼요. 하하.”
인기라는 걸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뮤지션 이상은의 길은 강변가요제 대상이라는 출발점부터 줄곧 내리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만들기 시작한 3집부터 15집까지 그는 제법 크고 탄탄한 존재의 집을 쌓았고, 그 안에 옹기종기 모여든 이들은 그의 음악으로 위로받고 위안을 얻었다. ‘마음의 여행’은 그의 음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솔직한 내 얘기를 담았기 때문에 공감을 주는 것 아닐까요? 내 음악의 주제는 늘 ‘치유’예요. 사람들이 듣고 마음의 상처가 낫기를 바라면서 만들죠. 번아웃이 왔을 때, 제가 음악으로 치유받았듯.”
데뷔 30년, 어떻게 이상은은 대중예술이라는 생존의 경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말괄량이 삐삐’와 같은 차림과 눈빛으로, 그가 껑충껑충 걸어 들어왔다.
◇“우리도 팬질 30년”… 함께 여행으로 자축
-여기 홍대에 아직도 사나요?
“네, 18년 간 한 집에서 살고 있죠. ‘홍대 터줏대감’이에요. 어느 새 홍대 인디신(Indie Scene)의 대모가 돼 있더라고요. (웃음)”
-홍대 분위기가 그만큼 잘 맞는 거겠죠?
“새로운 트렌드나 문화가 어떤지 바로 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은 평범한 주택가는 답답하게 느껴지죠. 오래 살다 보니 집이 정말 피부처럼 편하기도 하고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데 걔들 때문에 외로울 틈이 없어요.”
-올해가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예요. 그런데 조용히 보낸 것 같아요.
“30주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올해는 좀 멈춰서 그간의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있었던 일을 점검도 해보자는 뜻에서 제 자신을 좀 내려놓고 살았어요. 실은 그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이상은은 그간 2년에 한번씩은 정규 앨범을 내왔다. 그런데 2014년 2월, 15집 ‘lulu’(루루)를 발표한 이후 쉼표를 오래 찍는 중이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했을 텐데, (같은 해 4월 일어난) ‘세월호 참사’에, 탄핵 사태까지 겪으면서 그 전처럼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며 살 상황이 아니었어요. 생각할 것도 많았고요. 나름대로 치유하는 시간을 보냈죠.”
-많은 이들이 기념 음반을 내기도 하는데요.
“저는 팬들과 여행을 다녀왔죠! 팬클럽에서 올해가 딱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언니만 30년이 아니에요. 우리도 30주년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기념해야겠어요!’ 그러더니 기념 여행을 기획하더라고요. 저도 그 틈에 끼어서 3월에 3박 4일간 팬들과 태국에 다녀왔죠.”
-팬들과 해외여행이라니, 대단하네요.
“제 팬들이 좀 극성스럽긴 하죠. 하하. 또 제가 팬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공연하면 뒤풀이를 팬들과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건 여러 가지로 잡음이 날 수도 있는 행사잖아요. 30여명이 해외여행을 가는 거니까. 그런데 철저하게 팬클럽에서 기획해서, 저는 그저 들러리로 따라갔다 온 느낌이랄까요. 가보니까 ‘아, 이런 게 내가 할 수 있는 팬 서비스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덕’(성공한 덕후)이라면 성덕이다. 30년 ‘팬질’ 끝에 우상과 함께 해외여행이라니. 한국에서부터 준비해간 ‘30주년 기념’ 플래카드 같은 건 약과였다. 팬들은 현지 카페를 빌려 ‘깜짝 콘서트’까지 기획했다.
-팬들과 보낸 3박 4일은 어땠나요?
“제가 한국에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중간중간 외국도 많이 나가고 일본 활동도 했잖아요. 또 사라졌다가 들고 온 음악은 어렵고… (미소) 그러니 팬으로서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이번 여행으로 팬들에게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문은 어찌나 많던지요. 하하. 팬들에게 저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했죠. 그런 시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저도 아주 좋았고, 후기를 보니 팬들도 정말 행복했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극성스런” 팬들은 ‘2차’까지 추진했다. 그의 데뷔날인 8월 6일 제주에서 작은 음악회를 연 것이다. 1988년 강변가요제가 열렸던 날이다.
-팬의 입장에서, 팬의 역사 30년을 들을 기회였겠네요.
“팬들이 정말 각양각색 각계각층이에요. (음악)업계의 룰을 따지자면, 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보통인데 벽을 허물고 인간적인 스킨십을 할 기회가 생기니 정말 행복해하더라고요. 팬들이 자신들의 30년 성장을 자축하고 기념하는 게 저에게도 의미가 깊었어요. 데뷔 초에는 팬들에게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었죠. 학교도 안가고 공연 보러 오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혼내기도 하고요. 지금은 서로 고민 상담도 하는 ‘어른 대 어른’의 관계가 됐죠.”
◇야자시간, 강당을 ‘노래방’으로 만든 소녀
-어릴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어요?
“어릴 때야 하고 싶은 게 많잖아요. 저도 이거 할까, 저거 할까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한 시절이 있었고 흘러 흘러 가수가 됐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림을 해보려고 (미대) 준비도 했죠. 어우, 그런데 저하고는 안 맞더라고요! 석고상 하나 그리려면 5시간 정도 앉아 있어야 하거든요. 정말 답답했죠. 그런데 억지로 참고 애를 쓰며 그림을 그렸죠. 하루는 그게 폭발했어요. 화실에서 ‘너무 재미없다.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을 부추겼죠. ‘얘들아, 선생님도 없으니까 우리 아이스바 사다 먹으면서 놀자!’ 제가 탁자에 올라가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했던 기억이 나요. 아이들은 막 재미있다고 박수를 쳤죠. 그런데 그게 좋더라고요. 그때 알게 된 게 있어요.”
-뭔가요?
“너무 애를 쓰면서, 고생하고 노력해야 하는 건 자기 길이 아니라는 거요.”
-무슨 뜻이지요?
“노력하고 있다면 답을 못 찾은 것이고, 답을 찾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나는 늘 엄청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하고 있더라고요. 한국 사회에서는 다들 땀 흘려 애를 써서 이루는 게 당연하죠. 그래서 저도 ‘원래 그런 건가 보다’ 생각했는데, 발산하는 게 저한테는 훨씬 즐거운 일이었어요.”
고3 들어 그는 결국 진로를 바꿨다. 예ㆍ체능계이면서도 실기를 보지 않는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야자(야간자율학습) 같은 시간에 틈이 날 때마다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강당에 들어가서. 혼자 휘트니 휴스턴, 듀란듀란, 컬처 클럽, 마돈나의 노래를 불렀죠. 엄청 시원한 거예요. 노래 부르는 일이 되게 힘이 되더라고요. 강당 안의 오래된 건물 냄새도 무척 좋았죠. 제가 (서울) 창덕여고를 나왔는데 강당이 무척 고풍스러웠거든요. (이듬해) 강변가요제 나갈 때에는 그러니까 사실 어느 정도 보컬 연습이 돼 있었던 셈이죠. 하하.”
-얼마나 불렀어요?
“거의 매일요! 10분이든, 30분이든. 못 견딜 때 가서 답답함을 노래로 풀었어요. 강당이 제 개인 노래방이었던 거죠! (웃음)”
-강변가요제에 나간 계기는 뭐예요?
“대학에 입학한 직후엔 정신이 없었어요. 적응하느라고. 그러다 5월쯤 복학생 선배가 ‘강변가요제 나갈 애들 있으면 연락해라’ 하더라고요. 취미로 작곡을 했던 선배였거든요. 서너 명이 ‘저요’, ‘저요’ 하더라고요. 저는 고민하다가, 나중에야 용기를 내서 찾아갔더니 ‘야, 어떡하냐. 발라드는 다 나갔다’ 하더라고요. 그때는 ‘발라드의 시대’였거든요. 하나 남은 게 ‘담다디’였어요.”
-처음 들었을 때 어땠어요?
“원래는 굉장히 느린 곡이었어요. 미완성의 느낌인. 그래서 선배한테 이걸 좀 빠르게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죠. 당시 팝을 많이 들었던 때라서, 팝 음악처럼 편곡해보자는 거였죠. 그런데 놀랍게도 저만 강변가요제 본선에 진출을 한 거예요.”
그 시절 TV 속의 이상은은 전복(顚覆) 그 자체였다. 남성 출연자들을 압도하는 키(178㎝)에 쇼트커트, 하이톱 운동화를 신은 그는 탬버린을 들고 무대를 휘저었다.
-강변가요제 무대에 섰을 때 어땠는지 기억 나나요?
“맨날 강당에서 혼자 부르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 하니까 일단 기도를 엄청나게 많이 했죠. 너무 무서워서.”
-무서웠다니… 떨리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던데.
“아유… 일단 가요제 전에 노래 연습을 엄청 많이 했죠. 그리고 세뇌했죠. 연기를 하는 거라고. 고등학교 때 음악 잡지를 많이 읽었는데, 마돈나님이 이렇게 얘기한 구절이 있었어요. ‘노래는 3분 연기다.’ 나도 연기를 한 거죠.”
-쇼트커트 머리에 그렇게 길다란 여성 가수는 거의 처음이었어요.
“아, 그때 머리! 그거 집 앞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놔서 ‘으악, 이거 뭐냐. 이러고는 (가요제에) 못 나간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숱이 많은데 너무 곱슬거리기까지 해서 무스로 막 눌렀더니 더 뜨고… 결국 하는 수 없이 그 머리로 나간 거죠. 일부러 띄운 게 아니에요. 하하. 거기다 그 (흰) 바지는 체육복이었어요. 의상이 별 게 없었으니까요. 옷도, 머리도 지금 생각하면 엉망진창이었죠!”
-그런데 자유분방해 보여서 좋았어요.
“무대에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불렀어요. 무대에 오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엄청 좋아해서 속으로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어요.”
-대중의 반응을 처음 직면한 거죠.
“네, 혼자 강당에서 노래 부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죠. 무대에서 저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저도 신기했어요.”
강변가요제 현장에서 이상은을 바라보는 관중의 모습은 지금 봐도 ‘저런 별종이 다 있나’ 하는 것 같다. TV로 보는 시청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당시 사회를 봤던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수상 소감에 이어 “카메라를 향해서 한 사람만 불러보라”고 권하자, 이상은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우렁차게 외쳤다. 아직도 유명한 일화다.
-그때 왜 마이클 잭슨을 불렀어요?
“중2 때부터 광팬이었어요. 한 번 만나보는 게 꿈이었죠. 그 때는 미국 가는 것, 거기다 마이클 잭슨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거든요. ‘이제 상 탔으니까 마이클 잭슨을 만날 수 있겠구나’ 오로지 그 생각만 한 거죠. ‘기다려라, 내가 간다’ 이런 뜻으로 불렀어요. 물론 그 이후에도 못 만났죠. (웃음)”
◇‘담다디’의 성공이 준 번아웃… 훌쩍 유학길에
-수상 이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죠?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공적으로는 성공했는데 사적으로는 불행한 경우였죠. 나를 돌볼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어요. 공적인 데에 다 써버려서. 그 시절에는 (신인이) 거절하면 건방지다고 하던 때였으니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번아웃 된 거죠.”
-그 시절이 삶에 준 건 뭔가요?
“청춘이란 원래 ‘내가 원하는 게 이걸까’, ‘내가 가는 이 길이 맞을까’, ‘아니라면 어딜 가야 하는 걸까’ 고민의 연속이잖아요. 그래서 청춘이 불안한 거죠. 그 때 선택한 ‘일’(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의 일부로 놓고서 나는 뭘 배웠나를 생각해봤죠. 그것이 나에게 준 교훈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고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한때는 엄청 싫어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했죠. 그러고 나서 깨달은 건 그 시기가 실은 내 원동력이었다는 거예요. 그 일이 너무 싫으니 반대급부로 진짜 내 길, 강당에서 노래 부를 때처럼 시원하게 뻥 뚫린 느낌을 주는 길을 찾아가게 된 거죠.”
-그래서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거군요.
“정신을 차려보니 뉴욕에 와있더라고요. 한 달 동안 코피를 흘렸어요. 그간 몸에 피로가 그렇게 쌓여있던 거죠. 그 시절 그림이 오래된 친구처럼 위로가 돼주더라고요. 쉬는 마음으로 미대(프랫 인스티튜트)에 갔거든요. 그런데 뉴욕에서 새로운 음악들을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 AFKN에서는 나오지 않던 것들이었죠. ‘도대체 이건 뭐냐’ 싶을 정도로 제겐 어마어마한 신세계였어요. 수잔 베가나 트레이시 채프먼 같은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에 감동을 받았죠. 가사가 영문학적 가치를 인정 받아 책으로도 출간 된 레너드 코헨, 흑인 노예의 역사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밥 말리도 있었죠. ‘이거다!’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시 음악이 하고 싶어졌죠.”
불과 스무 살이었지만, 이상은은 대중 앞에 서본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음악이 이거라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루저’처럼 보이잖아요. (웃음) 세상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럼 나는 답변해줘야 하니까. 이제 겨우 (진짜를) 알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자기 손으로 만든 첫 앨범인 3집(‘더딘 하루’)을 들고 이상은은 대중에게 돌아왔다.
“그때 ‘왕따’ 같은 기분을 느꼈죠.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미지와 제가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 갭(차이)이 생긴 거죠. 정말 반응이 썰렁, 아니 냉혹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상당히 단련이 됐지만. (웃음)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싶어서 의기소침했던 시절이었죠.”
◇다 버리니 보인 싱어송라이터의 길
침체될 뻔한 그가 다시 용기를 갖게 해준 이가 강신자씨다. ‘가장 보통의 재일한국인’으로 꽤 알려진 재일교포 작가다.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사와 관련된 책을 집필 중이던 강씨가 이상은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강씨와의 만남이 일본 진출의 계기가 될 줄이야.
“언니(강신자)가 제 음악을 일본으로 갖고 가서 친구 가게에 틀어놨는데 팬이 생겼다는 거예요. 언니가 살던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은 (한국,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원래 새로운 문화에 개방적인 곳이죠. (일종의 문화교류 운동인) ‘크로스비트아시아’라는 활동도 벌어지고 있었고요. 나중에는 구마모토현에서 작은 공연까지 하게 됐는데, 불이 붙더라고요. 현장에서 팔던 앨범 시디(CD)가 ‘완판’되기도 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강변가요제라는 대형 무대로 데뷔한 ‘아이돌 출신’이었지만, 일본에서 그는 작은 무대부터 시작하는 ‘인디 가수’가 될 수 있었다.
“적지만 내가 나의 음악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서서히 생겼죠. 5집 때는 한 대기업에서 홍보ㆍ마케팅 지원을 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메인 스트림(주류)과 접합할 기회였죠. 처음엔 고민했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어서 받아들였어요. 내가 곡을 만드니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생긴 거죠. 내가 쓴 가사와 멜로디를 지킬 수 있다면, 포장을 화려하게 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게 나온 음반이 ‘언젠가는’이에요.”
‘언젠가는’으로, ‘달라진 이상은’이 확실하게 대중에 각인됐다. 이후에도 신대륙 탐험에 나선 듯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험이었다. 6집 ‘공무도하가’(1995년)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아직도 명반으로 꼽힌다. 타이틀곡인 ‘공무도하가’는 같은 이름의 고대가요를 가사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가락을 입힌, 전에 없던 대중가요다. 스물 다섯에 이런 곡을 썼다. 이 앨범은 평론가, 기자, PD, 애호가들이 만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10위에 꼽히기도 했다. 10위 안에 든 여성 뮤지션은 그가 유일하다. 한 편으로는 일본 활동의 영역도 점차 넓어졌다.
-이상은씨 노래는 가사가 특히 좋아요. 어떻게 쓰나요?
“제일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에요. 저는 보통 가사를 써놓고 그 가사가 잘 흘러가게 곡을 붙이거든요. 글이 먼저여야 멜로디가 나와요. 그러니 곡을 만들 때 하고 싶은 말이 탄탄하게 있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갈수록 힘들어져요. 점점 신중해지기도 하고요. 15집(2014년)을 낸 이후에 (다음 음반을 내기까지) 그래서 길어지나 봐요.”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예전엔 억지로 많이 읽었죠. 남들한테 노출이 되는 직업이니, 부끄럽기 싫어서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재미있게, 흘러가듯이, 시원하게 하자고 마음 먹죠.”
-지금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종종 나오는 ‘언젠가는’에 이런 구절이 있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그 가사 썼을 때가 겨우 스무 살 무렵 아니에요?
“‘담다디’같은 개고생을 하다 보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돼요! (웃음) 번아웃이 준 거죠. 체력과 정신의 한계를 뚫고 지나 탈진된 상태에서 보이는 세계가 있죠.”
-가사의 영감은 어디서 받나요?
“제가 여행을 좋아해요. 떠나야 가사가 나와요. 왜냐하면, 자기가 있는 장소를 떠나야 자기를 발견하게 되거든요. 여기에는 내가 없어요. 이상하죠. 나는 여기 있는 사람인데, 왜 떠나야 보이는가.”
◇“번아웃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신호”
불현듯 그는 최근 하와이관광청과 함께한 프로젝트 얘기를 꺼냈다. 사연을 보낸 신청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 하와이 여행 기회를 선물하는 행사였다. 이상은도 인터뷰에 참여했다. 그런데 한 여성 신청자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녀를 딱 보니, 벌써 넋이 나갔더라고요. 왜 힘드냐고 물으니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20년 가까이 회사만 다녔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러면서 ‘번아웃이 왔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서른 중반 밖에 안 됐는데. ‘왜 사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놀라서 물었어요. ‘자살하고 싶어요?’ 그랬더니 ‘그럴 기력도 없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거의 만장일치로 그녀에게 여행을 보내주기로 했죠. 사람 하나 살렸다 싶었어요.”
-정말 그렇겠네요.
“자기를 지킬 수 없을 때 번아웃이 오는 거니까요. 저는 번아웃이 왔다는 말만 들으면 ‘아, 저 사람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안절부절 해요. 그 상태가 어떤 건지 아니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아니까요. 여기선 우리가 연기를 하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사회적인 역할, 가정에서 역할이 있으니까. 해외에 나가면, 한 30년은 젊어진 느낌이 들어요. 그 기분이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그게 힐링이고, 치유지요.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서 ‘아,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어’ 하는 거죠.”
-이상은씨 음악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치유예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실제 제 음악을 듣고 마음의 상처가 나았다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간증’이죠. (웃음) ‘담다디’ 때부터 있었어요. 미국에서 살다가 네 살 때 한국으로 왔는데,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자폐증에 걸린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TV에서 제가 ‘담다디’를 부르는 걸 보고 나았다는 거예요. 아이 어머니가 선물을 싸 들고 고맙다면서 찾아온 적이 있죠. 지금은 커서 결혼도 했겠네요. 라디오 방송 진행할 때는 작가가 친해진 뒤에 그러더라고요. 유산으로 심각한 우울증이 왔는데 그때 ‘비밀의 화원’(2003년)을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실제 9집 앨범 제목이 ‘Asian Prescription’(아시아 처방ㆍ1999년)이기도 했죠.
“맞아요. 3, 4집 때만해도 그런 생각은 할 겨를이 없이 공부하고 곡 쓰고 제작하기에 급급했죠.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저도 세상에게 받은 상처를 음악을 만들면서 치유했더라고요. 90년대에 일본에서 제 공연을 본 한 노부부가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표현이 있었죠. 오늘 이 공연을 보면서 우리가 많은 곳을 여행했다고. 엄청 기뻤어요. 그때 깨달았죠. 내 음악으로 사람들이 치유가 됐으면 해서 음악을 한다는 걸. 거기다 ‘10년, 20년 후에 들어도 촌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두 가지 생각만 하면서 음악을 해요.”
-‘사람들이 왜 내 음악에 치유받을까’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픔이나 상처를 겪어본 사람이 남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솔직한 내 얘기를 하니까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거겠죠. 아까 말한 ‘비밀의 화원’도 우울증을 겪던 후배를 응원하려고 만든 곡이거든요.”
간증이 잇따랐다는 ‘비밀의 화원’ 가사는 이렇다.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실수투성이고 외로운 나를 봐/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거야 그대가 지켜보니/ 힘을 내야지 행복해져야지 뒤뜰에 핀 꽃들처럼.’
◇내 음악의 대주제는 ‘치유’
그는 세월호 참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무대에도 섰다. 2016년 8월 경기 안산시 단원고에서 열린 ‘기억과 약속의 방’ 문화제다. 세월호 참사 1,000일에 즈음해서 열린 추모 문화제에도 참여했다. 거기서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의 ‘언젠가는’을 불렀다.
-세월호 참사는 이상은씨에게도 큰 충격이었겠죠.
“대한민국 전체가 사고를 당한 것 아니었을까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단원고 문화제는… ‘아, 정말 내가 왜 갔을까’ 싶을 정도로 슬픈 무대였어요. 유족들이 누군가 참사의 진상을 덮으려고 한다며 농성을 했잖아요. 이게 말이 되나 싶었죠. 이들이 뭘 잘못했기에…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나. 너무 화가 나고 슬펐어요. 게다가 제가 노래 부르기 전에 희생된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는 순서가 있었는데, 정말 눈 앞이 (눈물로) 캄캄해졌죠. ‘언젠가는’이,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얘기거든요. 내 노래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으면서 아이들의 부모님 앞에서 불렀죠.”
-국정농단 정국 때 탄핵 촛불집회 무대에도 섰죠.
“제게 정치는 너무 어려운 주제예요.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서 얘기를 하자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문화ㆍ예술계도 함께 바뀌어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죠.”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 얘기군요.
“쇼크에, 쇼크에, 쇼크를 받았죠.”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보헤미안의 삶이 자유로운 건 장점이지만, 외로움도 있을 법한데요.
“그게 왜 없는지 저도 신기해요. 한때 너무너무 외로워서 고뇌하고 힘든 적도 있었죠. 지금은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나라가 어수선했기 때문일까요? 나 자신이 행복한 것이 정말 중요하다, 우울할 시간이 없다, 재미있게 살자는 거죠.”
-자신에게 음악이란 뭔가요?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저는 존재했겠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겠죠?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음악이죠. 그래서 그만큼 책임감도 더 느끼게 되고요. 거기다 내 음악이 치유의 힘까지 있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해봐야죠. (미소)”
-아티스트 이상은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제가 제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동심인 거 같아요.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동심이 없어지는 순간, 감수성도 소통 능력도 함께 사라질 테니까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는 공부하면 안 된다. 놀아라’ 이렇게 키우셨어요. 아이들이랑 해질 때까지 삼청공원에서 뛰놀다 집에 갔죠. 6학년 때 (반에서) 70명 중에 68등으로 졸업했어요. ‘어, 꼴찌는 아니네’ 했죠. 하하. 그 기억이 제 원동력이에요. 동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힘이죠.”
-음악은 언제까지 할 건가요.
“동심이 남아 있을 때까지! 노래할 수 있는 것, 시를 쓸 수 있는 것… 그건 내 안에 어린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죠. 모든 예술가는 다 그럴 거예요.”
그가 지금까지 낸 15개의 음반은, 그래서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사랑도, 이별도, 좌절도, 도전도, 여행도, 신비도, 용기도, 희망도 있었다. 그의 얘기와 역사는, 나의 것이기도 해서 우리는 위로받았을 거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뮤지션이 한 명쯤 있어서, 그가 자신을 잃지 않고 30년이나 노래해주어서, 그리고 앞으로도 거뜬할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아파하고 쓰러지고 일어서고 날아가는 우린 아름다워.’(‘인생은 아름다워’ㆍ2014년)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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