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에서 ‘기망(欺罔)’은 ‘속임’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낱말은 법과 관련한 영역 밖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속임’의 뜻으로 사용하는 한자어는 ‘기만(欺瞞)’이다.
‘기망’이 법률 용어로서 자리 잡게 된 건 일본의 영향 하에 우리의 근대법이 만들어진 것과 관련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기망’이 일본식 한자어가 아니라 이미 중세에도 썼던 한자어로, 출현 시기가 ‘기만’을 앞선다는 사실이다.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이나 ‘큰 사전’(1957)에서 ‘기망’과 ‘기만’을 동의어로 처리하되 ‘기망’에만 뜻풀이를 한 것은 이러한 역사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는 일상생활에서 ‘기망’의 쓰임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해방 이후에 ‘기망’은 법률 용어를 제외하곤 거의 쓰이지 않았다. 국어사전 편찬자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여 두 낱말의 풀이를 조정해 왔다. ‘큰 사전’ 완간 1년 후에 나온 ‘한글 중사전’(1958)에서는 ‘기망’을 ‘欺君罔上’의 준말로만 풀이하였다. ‘기망’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기망’과 ‘기만’을 동의어로 처리하면서 ‘기만’에서만 뜻풀이를 하였다. 어휘 사용의 흐름이 ‘기만’으로 넘어 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기망’은 지난 말을 되새기는 기능만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낱말이 법률 분야에서만 폐쇄적으로 쓰인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일 터. 일찍이 행정 용어 순화 편람(1993년 2월 12일)에서는 ‘기망’을 대신할 순화어로 ‘속임’을 제시한 바 있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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