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지난 100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은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그는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 현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동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이후 노동운동은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문제는 지식과 담론에서 핵심 주제를 이뤄 왔다. 서구사회에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그 대표 저작들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 문제를 다룬 대표 작품들로는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들 수 있다. 전자는 1970년대 노동문학을, 후자는 1980년대 노동문학을 상징했다.
박노해는 전태일처럼 노동자 출신이었다. 그의 시들은 체험에 바탕을 두었고, 그만큼 큰 아픔과 시린 감동을 전달했다. 그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노동의 새벽’을 출간한 것은 ‘문학사적 사건’이자 ‘사회사적 사건’이었다. ‘노동의 새벽’은 노동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데 지식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박노해의 삶과 문학
박노해는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박기평이다. ‘박노해’란 필명은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함의하는 일종의 암호였다.
박노해는 열여섯 살이 됐을 때 서울로 왔다. 선린상고 야간부를 다니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노동자로 일했다. 1983년 ‘시와 경제’ 2집에 ‘시다의 꿈’을 발표해 시인이 됐고,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내놓았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 시집의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노동의 새벽’은 100만부 가까이 판매됐고, 박노해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드르륵 득득 /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 시다의 언 손으로 / 장밋빛 꿈을 잘라 /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 끝도 없이 올린다.”
그의 이름을 알린 ‘시다의 꿈’이다. 전태일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 노동자의 고통스런 노동을 생생히 담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박노해는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겼다. 사회주의를 앞세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해 활동했고, 문예지 ‘노동해방문학’ 등에 시를 발표했다. 그는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1992년에는 시인클럽 포에트리 인터내셔널 로테르담재단 인권상을 수상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시집 ‘참된 시작’(1993)과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를 발표해 다시 한 번 큰 관심을 모았다. 1998년 광복절에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시집 ‘참된 시작’에 실린 ‘그해 겨울나무’의 마지막 구절이다. “지친 육신에 가차 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옥중에서 쓰인 시다. 그는 패배했다고 쓰고 있지만, 그 패배는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의 참된 시작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 박노해는 인간해방을 위한 사상과 실천을 모색했다. 생명ㆍ평화ㆍ나눔을 가치로 삼은 사회운동단체인 ‘나눔문화’를 설립해 활동했다. 흑백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전을 개최했고,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를 발표했다. 그는 노동해방 투사에서 생명과 평화 운동가로 자신의 삶을 확장하며 심화시켜오고 있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삶은 기적이다 / 인간은 신비이다 / 희망은 불멸이다 //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제 그는 기적의 삶, 신비의 인간, 불멸의 희망을 주목하고, 그 내부에 살아 숨 쉬는 생명과 평화의 전도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
‘노동의 새벽’은 광복 이후 우리 문학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박노해가 우리 문학과 사상에 기여한 바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문학의 관점에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새로운 노동문학의 등장을 알렸다. 노동문학의 새로움이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자가 문학의 주체라는 게 하나라면, 그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계급으로서의 집단이라는 게 다른 하나다. 영문학자 도정일은 말한다.
“박노해의 출현은 자그만치 노동계급이 대상적 위치로부터 주체의 위치로 이동하고 외부 목소리가 아닌 자기 목소리로 자기 계급의 의식을 표출하기 시작한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인 것이다.”
이어,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노동의 새벽’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산업화 시대의 그늘을 보여준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슨에 따르면, 계급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해 가는 역사적 집합체다. 사회학자 구해근에 따르면, 한국 산업화 과정은 수백만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경제성장 과정에 다름 아니다. 구해근은 경제적 효율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의 시각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정체성과 연대감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노해는 시 ‘노동의 새벽’에서 말한다.
“이 질긴 목숨을, / 가난의 멍에를, /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 우리들의 사랑 / 우리들의 분노 /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가운 소주잔을 /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 노동자의 햇새벽이 / 솟아오를 때까지.”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의 다른 이름이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누구나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노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태일이 살았던 시절의 노동은 인간해방은 고사하고 비인간적 삶 그 자체였다. ‘노동의 새벽’은 이러한 현실에 맞서서 노동하는 이들의 삶과 꿈, 분노와 희망, 연대와 해방에 대한 계몽과 성찰을 안겨줬다.
◇ 대압착을 향하여
전태일이 분신한 지 40여 년이 지난,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 지 30여 년이 지난 현재, 노동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만큼 노동 문제에도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해 왔다. 앞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살펴볼 때 지적한 바 있듯, 청년실업, 비정규직, 노후 일자리 등은 최근 노동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에 더해, 적지 않은 이들은 노동의 비관적인 미래를 전망한다.
오늘날 노동은 일대 전환에 놓여 있다. 제4차산업혁명의 도래에서 볼 수 있듯, 정보사회의 진전은 노동 없는 사회를 등장시키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볼 수 있듯, 노동 내부의 격차 또한 존재한다. 더불어, 골드칼라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 직업에 따라 그 격차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들이 함의하는 바는 노동의 핵심 문제가 다름 아닌 사회 불평등의 문제라는 점이다.
전태일과 박노해가 오래 전 외쳤듯,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기본 권리를 갖고 있다. 경제적 생활 조건은 그 기본권리 가운데 기본권리를 이룬다. 이런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누리기 위해 경제적 형평과 사회적 평등을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든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노동의 미래에 부여된 불평등의 완화 및 해소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다. 노동시장정책과 복지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21세기의 미래를 지켜볼 때 불평등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노동계급 안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대압착 정책이 미래 100년으로 가는 우리 경제와 사회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정운찬의 ‘한국 경제 아직 늦지 않았다’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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