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베델 보카사(Jean-Bedel Bokassa, 1921~1996)는 이디 아민(우간다 독재자)을 능가하는 사치와 모부투(콩고민주공화국)에 필적하는 학정으로 악명 높은, 아프리카의 상징적 독재자 중 하나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군에 입대, 2차 대전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60년 독립한 정부의 군 최고사령관을 지내다 66년 쿠데타로 집권해 만 13년간 통치했다.
사치의 정점은 1977년 그의 황제 대관식이었다. 72년 헌법을 고쳐 이미 종신대통령이던 그는 76년 정부와 의회를 해산하고 새 헌법으로 국호를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변경, 자신의 우상 나폴레옹 1세처럼 스스로 보카사 1세 황제가 됐다. 대관식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관 173주년 기념일인 77년 12월 4일 열렸다.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수도 방기(Bangui)의 건물들을 모두 새로 도색했고, 국내 초청 인사들을 위한 수백 벌의 옷도 신분ㆍ직업별 색깔까지 지정해 맞춤 제작했다. 나폴레옹 대관식을 고증, 프랑스 장인들을 불러들여 250만달러의 황금ㆍ청동 옥좌를 제작했고, 벨기에산 흰 말을 사들여 황제 마차를 끌고 근위병들에겐 노르망디의 회색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게 했다. 근위병들의 복장도 물론 나폴레옹 시대의 그것과 똑같이 제작해 입혔다. 그 작업을 저명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총괄했고, 황제의 가운은 랑방이 제작했다. 외빈을 위해 60대의 최신형 메르세데스 벤츠가 공수됐다. 보카사는 열대의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78만여 개의 진주와 120만여 개의 크리스털 비즈로 장식한 치렁치렁한 벨벳 가운과 황제관, 진주 장식의 신발과 흰 장갑을 끼었다.
하지만 일본 천황과 이란 팔레비 국왕은 물론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 세계 단 한 명의 국가 수반도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를 가족처럼 치켜세우던 당시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조차 외면했다. 어쨌건 그는 2,500~3,000만달러(행사 비용)를 들여 황제가 됐지만, 79년 9월 프랑스군에 의해 축출돼 채 2년도 그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강제 교복착용 조치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 100여 명을 학살한 직후였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86년 귀국 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0년 형으로 감형됐고, 93년 사면돼 3년 뒤 숨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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