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허송세월하다 벼락치기로 끝낸 심사
“한국 오려면 한국어 배워와야지” 통역로봇사업 전액 삭감 요구 황당
“차관, 얼마까지 양보할 수 있습니까?” “의원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달 22일부터 30일까지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위 예산안조정소위 회의 현장은 경매장을 연상케 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위원들의 주먹구구식 흥정에 적게는 수억원부터 많게는 수백억의 예산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예산 삭감에 합리적 근거나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회의 내용을 옮겨 적은 예산소위 속기록에는 이곳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인지, 시장 좌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졸속 심사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예산소위에서 감액 논의가 진행되는 패턴은 매번 비슷했다. 야당은 대폭 삭감을 요구하고 여당은 정부 편에서 감액 수준을 줄이는 ‘핑퐁게임’을 몇 차례 반복하다가 위원장이 중간 정도 액수에서 타협안을 제시하는 식이다. 위원장의 중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에는 보류안건이 됐다.
28일 고용노동부의 취약계층 능력개발 지원사업 심사가 대표적인 여야 간 주먹구구식 흥정의 사례다. 당시 야당 위원들은 기존 사업과의 유사ㆍ중복 문제를 지적하며 총액 245억 6,000만원 중 100억원 삭감을 주장했다. 이에 여당 위원들은 50억원 이상은 깎을 수 없다고 맞섰다. 야당이 다시 80억원 삭감을 제안했지만 여당 간사는 “흥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공방 끝에 위원장이 중재에 나섰고, 여야 모두 60억원 감액을 수용하는 것으로 논쟁이 마무리됐다.
위원들이 ‘무작정 삭감’을 외치니 가장 고역인 건 부처 공무원이었다. 감액 요구의 근거가 없다 보니, 위원들의 고압적 요구에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맞춰주는 기색이 역력했다. 22일 법무부 심사에서 한 야당 위원은 통역안내로봇사업 예산의 전액 삭감을 요구하며 “미국에 가려면 영어를 배워가야 하듯 한국에 오려면 한국어를 배워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논리라면 통역은 아예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30일 환경부 대기개선 추진대책사업 심사 때는 위원들의 삭감 요구와 정부 측 원안 유지 요청이 팽팽하게 맞서자 위원장이 직접 나서 “지금 환경부는 하나도 감액이 안 됐으니 최대한 (감액할 수 있는 액수를) 말해보라”고 압박했다. 결국 이날 심사는 환경부 차관이 40억원 삭감을 수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9일 산업통상자원부의 자율주행수소버스 시범운행사업 예산 70억원을 심사하는 과정에선 한 야당 위원이 이미 정부가 30억원 삭감 요구를 수용했는데도, 이런 내용을 듣지 못한 채 “25억원을 감액하라”고 말했다가 동료 의원의 귀띔에 다시 발언을 철회하는 황당한 상황도 벌어졌다. 이에 여당 위원들이 “어떻게 예산을 이렇게 자르냐”고 항의하며 공방이 이어졌다.
신규 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야당이 삭감을 벼르던 일자리사업과 대북지원사업 예산도 이런 이유로 잘리곤 했다. 고용노동부의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사업 심사 당시 야당 위원은 “첫 사업을 너무 크게 했다”며 “규모를 대폭 줄여서 해보고 성과가 나면 늘리자”고 회유해 전체 예산의 22%인 600억원을 깎아냈다. 대북지원 묘목을 생산하는 산림청의 남북산림협력사업도 여야 간 공방 끝에 파주 신규 양묘장 운영 비용 16억원을 삭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국회법에 명시된 예산소위 심사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초치기 심사가 만연했다. 소위 마지막 날인 30일에는 회의장에 스톱워치까지 놓고 심사 시간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날 자정을 기일로 예산안이 본회의에 부의되는 만큼 어떻게든 심사를 재촉해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오전까지 ‘5분 당 1건’이었던 심사시간은 오후부터 ‘3분 당 1건’으로 줄어들었다. 위원 간 공방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면 위원장은 지체 없이 “보류”를 외쳤다. 그 덕에 예산소위는 법정시한을 3분 남겨놓고 회의를 마칠 수 있었지만 예산 223건을 소소위 밀실 심사로 넘겨야 했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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