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달라진 집, 자라난 꿈 하>
주거복지 혜택에 연립 이사… 노래 연습하며 가수 꿈 키워
컨테이너 생활했던 소진양, 임대주택 온 후엔 친구도 초대
좁은 단칸방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만의 공간이 있는 ‘집다운 집’이 생기자 가족은 다시 뭉쳤다. 보금자리로서, 안식처로서 집은 그렇게 소중했다.
◇단칸방을 벗어나자 웃음이 돌아왔다
경기의 한 소도시에 사는 박태환(16ㆍ가명)군은 지난해까지 보증금 300만원, 월세 25만원을 내는 16.52㎡짜리 단칸방에서 살았다. 태환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함께 사는 고모(48)가 ‘엄마’인 줄 알았다. 이혼한 엄마와 아빠는 두 살 누나와 생후 1개월 태환이를 두고 집을 떠났다. 고모는 자신의 아들과 똑같이 남매를 보듬어줬다. 하지만 사별한 몸으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건사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아놓은 돈도 떨어지고 몸이 아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반지하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과 고모는 부대끼며 그 단칸방에서 2년을 살았다.
비가 올 때면 아이들은 바가지로 방 안에 고인 물을 퍼내야 했다. 침대와 장롱이 차지하고 남는 방 안 공간은 폭 0.9㎡ 남짓. 태환이는 누나와 고모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비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잤다.
집 밖으로 겉돌던 사촌 형은 가출을 반복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폭발했다. 아들을 고시원으로 떠나 보낸 고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왜 내 인생을 괴롭히냐”고 태환 남매에게 날 서린 말을 쏟아낼 때도 있었다. 사춘기 남매는 원룸에서 편히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고, 누나는 “집이 비좁아 짜증나니 어디든 좀 나가라”고 태환이 등을 떠밀었다. 동생이 집 밖에서 혼자 울 때면, 누나는 집 안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러던 태환이에게 밝고, 넓고, 깨끗한 방이 생겼다. 반지하층이 아니라서 햇빛이 잘 들어왔다. 주거복지 혜택으로 저렴한 이자만 내고 49.58㎡짜리 방이 두 개나 있는 연립주택에서 살게 됐다.
이사하던 9월의 어느 날, 떠난 사촌 형이 돌아왔다. 3만원을 주고 산 페인트를 문에 칠하면서 가족은 엉엉 울었다. 12일 새로 옮긴 집에서 만난 태환이는 “나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웃었다.
고모에게는 ‘주방’이 생겼다. 단칸방에는 도마 하나 놓을 수 없는 간이 싱크대가 전부였다. 냄비 프라이팬 같은 주방도구는 좁은 집에 짐이 될 뿐. 그래서 고모는 집에서 요리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즉석밥과 도시락만 먹어야 했던 태환이는 고모가 만든 ‘소고기무국’이 식탁 위에 오를 때면 최고라고 엄지부터 치켜든다. 1년 전만 해도 밥상을 펴고 나면 앉을 자리가 없어 침대에 걸쳐 앉아 밥을 먹던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은 태환이가 밝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시험공부를 한다. 태환이는 “땅만 보고 다니고 늘 주눅들어 있었는데, 이젠 사람들 눈을 잘 마주치고 굽었던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다닌다”고 으쓱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교회를 다니다, 최근엔 고등부에서 ‘총무’ 자리도 맡았다. “사실은 얼마 전 교회에서 여자친구도 생겼어요.” 아이는 수줍어하며 ‘헤헤’ 웃었다.
지금 태환이는 ‘꿈’을 향해 달린다. 이사를 했던 지난해 친하게 지내는 형이 노래를 가르쳐준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이젠 방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않는다. 유튜브로 유명한 가수 영상을 보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연습을 한다. 가수가 돼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는 태환이는 친구에게 춤을 배워 연예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가기도 했고, 최근에는 노래 경연에 나가 1차 예선에도 합격했다. “예전 집에서는 살기 싫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런데 집이 바뀌니까 성격도, 꿈도, 한마디로 내 인생이 다 바뀌었어요.” 태환이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태환이처럼 주거 환경 개선을 경험한 아이들 삶은 부쩍 달라졌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7월부터 두 달간 주거지원사업 대상에 선정된 13가구(보증금지원 9가구, 개ㆍ보수지원 4가구)를 심층 면접한 결과, 아이들은 아토피 같은 질병들이 치유되는 등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사회성 발달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등 교우 관계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또래관계가 향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전성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기북부아동옹호센터 소장은 “우울하거나 폭력적이던 아동의 심리 상태가 편안하고 안정되는 등 집 하나 바꾸는 효과를 넘어 아동의 신체적, 심리적 발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는 아이와 가족의 전반적인 주거생활에 여유를 갖다 줬고, 그만큼 아이의 행동도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진단이다.
반면 아이들이 주거빈곤에 시달릴수록 아동 인권도 추락했다. 재단이 한국복지패널 제1차(2006) 제4차(2009) 제7차(2012)년도에 모두 참여한 아동 47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주거빈곤 기간이 길어질수록 식료품 지출비용은 줄어들고 비만지수는 높아졌다. 학교생활 적응 및 학업성취도가 감소했고, 동시에 가족갈등 사례는 빈번했다. 심지어 화장실이나 목욕탕 등 필수설비 미달 기간이 길어질수록 성추행 피해 경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음껏 씻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초등학교 6학년 윤소진(12ㆍ가명)양이 학교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가는 곳은 화장실이다. 5층짜리 빌라 계단을 걸어서 올라오느라 땀이 나서라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우면 덥다면서, 추우면 춥다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53)는 “씻고 싶을 때 씻을 수 있는 게 요즘 소진이에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소진이가 그럴 듯한 화장실을 갖게 된 건 1년5개월 전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도움으로 방 55㎡짜리 빌라에 둥지를 틀면서다. 그 전까지 살던 곳은 이웃 할머니가 내어준 18㎡ 컨테이너 창고였다. 수도시설과 난방시설이 따로 없어 주인 할머니집에서 일주일에 1, 2번 샤워를 했고, 그나마도 할머니가 안 계시면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우산으로 몸을 가린 채 씻어야 했다.
기자가 가 본 소진이 새 집은 밝고 넓었다. 경기의 한 도시에 있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10만5,000원짜리 임대주택. 그 전에 살던 컨테이너보다 3배 정도 넓었고, 무엇보다 큰 창문이 나 있어 전등 없이도 집 안 전체가 환한 게 소진이는 마음에 쏙 들었다. 아버지는 “집 안에서 화장실도 갈 수 있고, 물도 쓸 수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라고 했다.
소진이는 ‘내 방’이 생겼다는 게 둘도 없는 행복이다. 컨테이너박스에서 살 땐 신발장, 옷장, 간이침대 등 가구가 가득했고, 가로 세로 1m짜리 상을 펴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이 침대에 누워서 TV를 보는 일 뿐이었다. 그러던 소진이에게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새 취미도 생겼다. 책상 위에는 삼각대, 셀카봉 등 촬영장비들이 가득했다. 소진이는 “요즘엔 재미있는 거 신기한 거 발견하면 전부 찍어서 동영상으로 만드는 게 유행이니깐요”라고 설명했다.
새 집을 얻는 과정이 그리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재단이 소진이에게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2015년. 면사무소로부터 소진이의 사정을 전해 듣고 새 보금자리까지 알아봐준 터였다. 하지만 아버지 윤모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데 보증금과 이사비용은 어떻게 마련 한답니까?” 간경화와 척추통증으로 일을 하지 못 했고 매달 기초생활수급비 80만원을 받는 게 수입의 전부, 재단에서 보증금을 지원해준다는 걸 몰랐던 윤씨는 ‘이사’ 단어를 듣는 순간 곧장 귀를 닫아버렸다고 한다.
재단의 재차 설득 끝에 이사를 하게 된 윤씨는 이제 소진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고 싶다고 한다. 나만의 집이 생기면서 소원했던 친척들과 친구들을 초대해 대접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다. 윤씨는 “그간 관계 단절로 외롭게 지냈지만 이제는 자주 초대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 소진이도 새로운 꿈을 품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새로 생긴 부엌에서 크고 작은 요리를 직접 만드는 것에서부터 작은 행복을 느끼고 있다. 최근엔 아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소진이는 “내년이면 중학교에 입학하는 만큼 내가 가진 꿈을 잘 키워서 훌륭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일보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공동기획입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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