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년 만에 스즈키컵 우승… 선수들 금성홍기ㆍ태극기 감고 인사… 자정 넘어까지 축제의 장
박항서(59)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1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가진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대 0으로 꺾자 베트남이 발칵 뒤집혔다. 1975년 동족상잔의 전쟁이 막을 내린 후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이날 밤처럼 ‘벳남(베트남)’을 연호한 적은 없었다.
◇”해냈다, 베트남”
경기 시작 6분. 꽝 하이 선수가 상대 페널티 지역 왼쪽에서 쏘아올린 크로스를 응우옌 아인 득 선수가 왼발 발리슛으로 골대로 밀어 넣자 4만 관중석은 거대한 함성과 함께 일제히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옆에 있던 사람과 부둥켜 안거나 악수를 하면서 흥분했다. 부부젤라를 가져 온 이들은 볼이 터지도록 바람을 불어 넣었다. 관람석 곳곳에 배치돼 근엄하게 근무 서던 공안도 이 순간만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호했고, 더러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올렸다. 친구들과 경기장은 찾은 득(51)씨는 “베트남이 해냈다”는 말만 반복해서 쏟아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경기장을 직접 찾아 관람하던 응우옌 쑤언 푹 총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축하 악수를 나누며 기쁨을 만끽했다. 베트남 권력 서열 2위인 푹 총리의 경기장 직접 관람과 응원은 지난 6일 결승행 티켓을 놓고 필리핀과 벌인 경기에 이어 두 번째다. 특히 이날엔 서열 3위의 응우옌 티 낌 응언 국회의장도 직접 경기장을 찾아 국민들과 기쁨을 나눴다.
◇선제골로 분위기 압도
일제히 들어올린 휴대폰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때문 만은 아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던 관람석은 베트남 대표팀의 선제골로 한층 밝아졌다. 이후 4만 관중은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경기를 즐겼다. 전반 10분 말레이시아 선수의 발에서 출발한 공이 베트남 골대 밖으로 비켜나가자 이번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벳남 고올렌(파이팅)’을 외쳤다. 한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파도타기 응원이 시작됐고, 휴대폰 조명을 이용해 압도적인 응원전을 이어갔다. 검은 티셔츠로 맞춰 입은 말레이 관중들도 웃통을 벗어젖히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지만 그들이 흔들어 대는 깃발만 보일 뿐 다른 모든 것들은 거대한 붉은 물결에 묻혔다.
1대 0 리드를 유지하며 달려온 전후반 90분과 추가 시간 4분. 심판이 경기 종료 휘슬을 울리자 4만 관중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지 매체 축구 담당 기자는 “베트남을 동남아가 아니라 세계에 알린 경기”라고 평가했다.
◇형용하기 힘든 감격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이들은 또 다시 관중석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호찌민시에서 직접 경기를 보기 위해 출장을 앞당겨 왔다는 응우옌 반 티엡(36)씨는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앞으로의 일에 더 자신감이 생겼다(More confidence in future)”며 한국인 박 감독에게 사의를 표시했다. 이날 경기장을 가득 메운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 흩어져 앉은 한국인 관광객과 교민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경기장 곳곳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가 섭씨 17도의 선선한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베트남 국민들은 너나없이 경기장을 찾은 한국인 기자를 환대했다. 경기장을 직접 찾아 베트남 국민들과 함께 응원전에 나선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는 “나만큼 큰 행운을 누리는 대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문을 연 경기장에서 길게는 5시간을 보낸 이들. 앉아만 있으면서도 적지 않은 체력을 소모한 그들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박 감독과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화상통화를 하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부는 말레이 응원객들과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경기 종료와 동시에 귀빈석에서 필드로 달려 내려가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종전 43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베트남에서 대표선수들은 그 어느 정치인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이들이다. 푹 총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300여명 규모의 말레이 관중석 앞으로도 다가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축제는 이어지고
선수들은 경기장을 돌며 팬들에게 국기인 금성홍기를 흔들며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이날 골을 넣은 응우옌 아인 득 선수와 짠 딘 쫑 선수는 대형 태극기를 번갈아 몸에 감았다. ‘이 날’이 있게 한 한국인 박 감독에 대한, 그들이 운동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경 표시였다.
필드의 선수들과 행사 관계자들은 무수히 많은 기념사진 촬영과 축하 인사 사이에서 시상식을 치렀다. 총리와 국회의장이 경기 종료 후 경기장을 나서는데 약 40분이 걸렸다.
경기가 끝난 지 1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10시 반. 경기장 밖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장 밖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관람하던 이들이다. 이들은 붉은 기를 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광했다. ‘벳남 꼬올렌(파이팅)’ ‘벳남 보딕(승리)’을 연호하느라 탈진할 정도였다. 경기장 옆 도로를 완전히 점령한 오토바이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과 스트론튬을 태운 붉은색 불꽃다발이 피우는 매캐한 연기가 온 하늘은 뒤덮었다. 평소 같았으면 공안(경찰)이 달려와 제지했을 사태였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승용차, 지게차, 트럭을 동원한 위험천만한 각양각색의 응원들이 이어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경기장 주변과 시내 주요도로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극심한 체증에 시달렸다. 헤아리기 힘든 숫자의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한데 얽혀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경적을 울리거나 누굴 탓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지난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준우승, 지난 9월 아시안게임 4강 신화에 이은 ‘박항서 매직’의 또 따른 주인공이기도 했다. 박 감독은 경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트남 국민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하노이=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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