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10여명 구한 정동화씨
“이곳(세종병원)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화마(火魔)속에서 미처 구해 드리지 못한 장모님과 희생자분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지난 1월26일 아침 46명이 숨지고 109명이 다치는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경남 밀양시 가곡동 세종병원 화재 현장에서 아내와 함께 자신의 이삿짐 사다리차로 병원 5층에 갇혀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던 환자 10여명을 구조한 ‘숨은 영웅’ 정동화(56)씨.
지난 19일 다시 찾은 세종병원 화재 현장에서 정씨는 화재 당시 이 병원 3층에 입원한 장모(88)를 구하지 못한 상실감에 고개를 숙였다.
“당시 심정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죠. 아직도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재 당시 그는 장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내(55)와 함께 자신의 1톤 사다리차를 몰고 2㎞가량 떨어진 세종병원으로 내달렸다. 10여분만에 병원에 도착했지만 시커먼 연기가 병원 주위를 뒤덮고 병원 앞 도로는 소방차와 구급차 등이 뒤엉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병문 정문으로의 진입을 포기하고 차의 핸들을 요양병원 주차장 골목길로 돌렸다. 세종병원과 연결된 요양병원 주차장엔 다행히 차 량 한대의 주차공간이 남아 있었다.
밀양 토박이에다 이삿짐 사다리차 영업을 하며 웬만한 골목길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정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양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정씨는 본능적으로 25m길이의 사다리를 펴 요양병원 5층 병실 창문까지 올렸고 병원 직원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연거푸 환자들을 태워 구조했다.
당시 자신의 장모가 입원한 병동은 이미 화염이 뒤덮어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씨는 “한 명의 환자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직 화마가 뻗치지 않은 요양병원 병동의 환자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그는 “고층의 환자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숙련된 기술로 10여분만에 이삿짐 운반용으로 사용하는 사다리차를 주차장 바닥에 고정시키고 사다리를 펴 요양병원 5층 병실 창문에 연결해 사다리차 끝부분의 바스켓을 통해 병원직원 1명이 환자 2명씩을 태워 내리기를 반복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상황에서 ‘사다리차 구조’에 나선 정씨의 용기와 기지는 당시 슬픔에 잠긴 밀양시민들에게 큰 위로를 안겼다.
당시 화재 현장에 함께 온 정씨의 부인과 처남(59), 처제(48) 등도 병원으로 올라가 환자들의 탈출을 돕다 처남과 처제는 연기를 많이 마셔 입원 치료를 받아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다.
장모의 생사 여부 조차 확인하지 못한 정씨는 구조활동을 마친 뒤 이날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장모가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가 상태가 악화해 창원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창원으로 이송된 장모는 이날 밤 끝내 숨을 거뒀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주위에서는 정씨가 장모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까 우려된다며 위로와 격려를 건넸다.
개인용달업에 종사 하다 2017년부터 사다리차를 운영하고 있는 정씨는 일년 내내 실외에서 이삿짐을 날라야 하는 직업 특성만큼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화재 참사 이후 심한 스트레스에 급성 위경련 증세로 내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화재 현장에서 몸을 던져 기지를 발휘한 정씨의 선행에 경남도는 도민의 뜻을 모은 도지사 감사패 전달로 화답했고, 정부도 지난 5월 제25회 방재의 날을 맞아 정씨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정씨는 또 이달 3일 열린 제14회 안전문화시상식에서 행정안전부로부터 올해의 ‘참 안전인상’을 받았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데 많은 사람들은 기억 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제(18일)‘강릉 펜션 참변’등 안전불감증에 따른 끔찍한 대형사고가 재발하는 악순환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사회 만연한 안전불감증을 꼬집었다.
한편, 대형참사가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은 화재 후 바로 영업이 중단돼 정문과 응급실 쪽 출입문 모두를 봉쇄한 채 도심 속 황량한 폐가처럼 건물만 덩그렇게 서 있다. 검경은 이 사건으로 병원 관계자 16명을 입건해 이사장과 행정이사, 총무과장 등 3명을 구속하고, 밀양시 등 공무원 16명에 대해선 각 기관에 통보했다. 하지만 1년이 되도록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마무리 되지 않았다.
밀양=글ㆍ사진 이동렬기자 d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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