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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제로 ‘희망고문’… 파열음도 커졌다

입력
2018.12.21 04:40
수정
2018.12.21 08:59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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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그마가 된 文정부의 약속들] 

 코레일 협력업체 소속 정비원 “정년 5년 줄어 노후계획 차질” 

 공공부문 10만명 정규직 전환에도 근로자 처우 개선은 ‘먼길’ 

지난 4월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에서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산업은행, 문재인 정부, 지엠 자본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홍인기 기자
지난 4월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에서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산업은행, 문재인 정부, 지엠 자본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홍인기 기자

※ 동력을 잃은 정책이 꽤 있다. 현실에 맞게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에도 대통령 핵심공약이란 이유로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더 이상 정책이 아니라 그냥 도그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잘못된 정책의 피해는 국민의 몫이고, 정권엔 부메랑이 된다. 2018년 내내 논란이 되었던, 2019년에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의제들을 짚어 본다.

코레일 시흥 기지에서 전철 등 철도 차량 정비 업무를 하는 협력업체 소속 정비원 박상준(61)씨는 ‘비정규직 제로’ 정책으로 내년부터 코레일 소속 정규직으로 전환되지만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 정규직 전환으로 정년이 68세에서 63세로 5년이나 앞당겨져 노후 계획을 완전히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까지 임금과 국민연금을 저축해 1억5,000만원을 만든 뒤 전남 여수로 귀촌한다는 것이 그의 노후 계획이었지만 정년 단축으로 꿈을 접어야 할 처지다.

박씨가 다니는 협력업체(하청) 한국철도차량엔지니어링은 65세 정년과 정년 이후 촉탁직 근무 3년을 보장해줬다. 그런데 코레일 노사가 지난달 박씨와 같은 파견ㆍ용역 비정규직 1,466명을 내년 1월1일부터 본사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전환 대상자들도 앞으로 정규직과 같은 정년 60세가 적용된다. 고령자에 한해 전환 대상자 정년을 최대 2년 늦춰주기로 했지만 졸지에 1, 2년 내 회사를 그만 둬야 하는 상황에 놓인 직원이 610명(60세 이상자 수)으로 절반에 육박한다. 박씨는 “정규직 전환이 고령 직원 수백명의 노후를 위협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토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12일 취임 후 첫 현장 방문지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만연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가 될 거란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1년 7개월여가 지난 지금, 평가가 예전 같지 않다. 전체 공공부문 비정규직 41만6,000여명 중 10만6,000명(11월말 기준)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 수치적 성과는 분명 있다. 하지만 처우 개선은 진전이 없거나 오히려 후퇴했고, 정규직 전환 방식을 둘러싼 노ㆍ사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상당하다. 정부가 비정규직 제로라는 ‘도그마’에 빠져 목표 달성에만 치우친 나머지 정작 근로자 처우 개선이라는 본질은 뒷전에 밀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정규직 전환_신동준 기자/2018-12-20(한국일보)
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정규직 전환_신동준 기자/2018-12-20(한국일보)

 ◇정규직 전환 이후 처우 나빠져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얼마 전 시설관리, 미화, 청소 분야 파견ㆍ용역 근로자 18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중진공파트너스’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이들을 채용하는 방식이었다. 비정규직의 기대가 컸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실질 임금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운수노조 중진공파트너스 지부에 따르면 정규직 전환 이후 명목 임금은 그대로이지만 실질 임금은 되레 줄었다. 이전에는 하청업체가 계약을 맺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자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전환 이후 이런 혜택이 없어졌다. 대신 지급하는 식비는 고작 월 5만원이다. 휴가 일수도 감소했다. 8일이 보장되던 특별휴가는 3일로 줄었다. 서재천 중진공파트너스 지부장은 “식비와 연차수당 변화로 월 실수령액이 10만원 이상 줄어들었다”며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규직 전환 1호’라는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도 여기저기 불만이 터져나온다. 공항에서 탑승교(비행기와 공항 건물을 연결하는 다리) 운영 일을 하는 근로자 중 제1터미널 근무자는 이미 자회사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제2터미널 근무자는 용역 계약기간이 남아 2020년 7월부터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제1터미널 근무자가 조금이라도 처우가 나아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2터미널 근무자가 월 평균 10만원 정도 더 번다고 한다. 용역업체는 2018년도 노사 단체협약에 근거해 임금을 주지만, 자회사는 노ㆍ사ㆍ전문가 협의체 결론이 안 나왔다는 이유로 2017년이나 2016년 기준 임금을 주고 있어서다.

내년 초부터 자회사인 인천공항운영관리㈜ 소속 정규직으로 바뀌는 공항 시설관리 비정규직 90명의 표정도 좋지 않다. 용역업체 시절에는 주간조 60명, 야간조 30명으로 나뉘었는데, 사측은 자회사 전환 이후 야간조 30명 중 12명을 주간조로 돌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주간조로 바뀌는 기존 야간조는 야근수당이 없어져 연봉이 약 700만원 줄어들게 된다. 양문영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조직부장은 “공항 구조물 공사는 주로 승객이 없는 야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야간조 감축은 결국 야간조의 업무 부담 과중과 시설 보수 작업 지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직접고용 vs 자회사 논란에 두쪽 난 기관들 

정규직 전환 정책이 멀쩡하던 공공기관을 회복이 쉽지 않은 갈등의 늪에 빠뜨리는 사태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파견ㆍ용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식은 각 기관별로 노ㆍ사ㆍ전문가 협의체를 꾸려 논의하라는 것이 정부 가이드라인이다. 그런데 전환 방식을 결정할 기준을 거의 제시하지 않고 협의체에 결정을 미루면서 자회사를 선호하는 사측과, 직접고용을 바라는 노측 간에 동상이몽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인 잡월드는 정규직 전환 대책으로 조직에 큰 생채기가 났다. 잡월드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상대로 일자리 전시관을 운영하는 직원 400명 안팎의 조용한 공공기관이었다. 원래 정규직 노조(우리잡월드노조)만 있었는데, 파견ㆍ용역업체 근로자 338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의체가 지난해 꾸려지며 체험관 강사 직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노조(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 분회)가 설립됐다. 잡월드 분회는 협의체가 제시한 자회사 방식이 아닌,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단식 투쟁, 점거 농성 등을 했고, 사측은 물론 정규직 노조, 분회에 가입하지 않은 비정규직 근로자와 충돌했다. 극한 대립 끝에 잡월드 분회는 지난달 30일 2020년까지 사측과 함께 고용과 처우 개선 발전 방안을 마련하는 것을 조건으로 자회사 전환 채용에 합의했다.

그러나 앙금은 여전하다. 자회사 직원(기존 비정규직) 중심으로 잡월드 분회에 대항해 ‘한국잡월드노조’라는 새 노조가 만들어졌다. 직원 400명인 기관에 노조가 셋이나 들어선 것이다. 김정환 잡월드 정규직 노조 위원장은 “정규직 전환 정책에는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너무 급하게 추진된 탓에 기관 내 갈등이 불거지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갈등이 현재 진행형인 곳도 상당수다. 과학기술계 정부 출연 연구기관 25곳은 공동출자 인력 회사를 만든다는 전례 없는 정규직 전환 방식을 검토 중이다. 인력 회사를 하나 만들어 25곳의 비정규직을 넣은 뒤, 일은 지금처럼 각 기관에서 시키겠다는 발상이다. 이를 강력 반대하는 노조는 지난 10일부터 5개 기관에서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광오 전국공공연구노조 사무처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내놓지 않으면서 노사가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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