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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산업 붕괴 위기… “출구 찾을 시간 달라”

입력
2018.12.24 04:4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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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그마가 된 文 정부의 약속들 <2> 탈원전] 

 원전업계, 정부의 급격한 탈원전 정책에 일감 뚝 

 수백개 중기업체 감원 불가피… 일자리 찾기 어려워 

 “정책 잘못됐다는 것은 아냐… 추진 방식이 문제”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 이행과정. 그래픽=송정근 기자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 이행과정. 그래픽=송정근 기자

“두 달 전 50대 초반 부장이 퇴사했다. 그의 아내는 위암 투병 중이고, 아이들은 초등학생, 중학생이다. 아직 일자리를 못 구해 실업급여 받아 버티고 있다고 들었다. 내년에도 이런 일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힘들다.”

경북 김천혁신도시에 있는 한 원자력발전소 전기설계업체의 A 부사장은 퇴사한 후배 걱정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퇴사한 부장은 원전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베테랑이다. 전문 기술인력이지만 원전 분야 특수성 때문에 다른 업종에선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환경과 안전을 우선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원전 관련 중소기업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업체마다 상황이 다르니 발전소에서 한솥밥을 먹던 기술자들 사이에도 금이 간다. ‘누군 살고 누군 죽으란 소리냐’며 분열될 기미마저 보인다. 원자력산업 위기는 비단 그들만의 사정이 아니다. 산업이 무너지면 전체 원전 안전이 위협받는다.

원전 업체들은 탈원전 정책 자체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사숙고 없이 일단 선포부터 하고 무작정 밀어붙인 정부의 추진 방식이 너무 서툴렀다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일궈온 원자력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도록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 믿고 모든 걸 걸었는데…” 

A 부사장이 다니는 회사는 올해 매출이 지난해보다 60% 줄었다. 80명 넘던 직원이 지금은 30명 수준이다. 임금은 2년째 동결이다. 내년에 신한울 1, 2호기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이 준공되면 일감은 뚝 끊긴다. 건설이 재개된 신고리 5, 6호기도 내년부터는 신규 일감이 급격히 줄 게 분명하다. 지난 정부 때 원전 공기업들과 신한울 3, 4호기 건설설계 계약을 맺었지만, 정부가 바뀌자 없던 일이 됐다. 이대로라면 추가 인원 감축이나 임금삭감을 할 수밖에 없다.

B 부사장은 지난 정부의 신규 원전 6기 건설 계획을 믿고 김천에 내려와 사무실을 차렸다. 원청인 한국전력기술이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을 원전의 메카로 키우겠다고 발표해, 직원들에게 정착 비용까지 지원하면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자 건설 계획은 백지화했고, 한전기술이 보낸 공문 한 장으로 업무가 중단됐다. B 부사장은 “배신감도 이런 배신감이 없다”며 “퇴사한 후배들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접고 막노동 나간다는 얘길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B 부사장은 배관 기술자다. 전기와 배관 설계는 일반 건물에도 필요하지만, 원전과는 전혀 다르다. 조명 하나를 켜더라도 일반 건물은 전기선 하나면 되지만 원전은 두세 개 있어야 하고, 전력이 끊길 사태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원전을 일반 건물에 비교하면 ‘과잉 설계’가 기본이다. 그래서 같은 전기 기술자라 해도 원전과 일반 건물 공사 경험은 큰 차이가 난다. 원전에서 숙련된 기술자가 다른 분야에 취업하거나 업종 변환을 하기가 쉽지 않다.

원자력산업에 종사하는 국내 중소중견기업 수는 약 600개로 추정될 뿐 정확히 파악조차 안 돼 있다. 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급격한 탈원전 정책으로 많은 업체가 인원을 줄였거나 줄일 예정이고, 회사를 떠난 기술자들은 실직자나 자영업자가 됐다. A 부사장은 “누가 외국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소문이 떠돈다”며 “만약 내게 그런 제안이 오면 고민할 여지가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한 원전기자재업체는 신한울 3, 4호기 건설 중단으로 현장에 파견 보낸 직원 80여명을 내보냈다. 위기의식에 남아 있는 직원마저 줄줄이 회사를 떠난 바람에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 직원 모집공고를 냈지만 들어오는 이력서는 거의 없다. 이 업체의 C 사장은 “있던 사람도 탈출하는 마당에 누가 들어오겠나”며 답답해했다.

이달 초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 6호기 건설 현장 모습. 각각 2022년, 2023년 준공 예정이며, 현재 공정률 약 40%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이달 초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 6호기 건설 현장 모습. 각각 2022년, 2023년 준공 예정이며, 현재 공정률 약 40%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가동 중인 한 원자력발전소에서 한국수력원자력 직원이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한수원 제공
가동 중인 한 원자력발전소에서 한국수력원자력 직원이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한수원 제공

 ◇어려운 와중에 밥그릇 싸움 내몰려 

원자력 업계는 건설설계와 유지보수 분야로 나뉜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건 건설설계 분야다. 유지보수 쪽은 사정이 좀 다르다. 원자로에 설치하는 장비를 자체 개발해 납품하는 원전부품업체의 D 대표는 “우린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해당 장비는 원전을 15년 정도 운영하면 교체하기 때문에 가동 중인 원전에서 수요가 생길 수 있다. 더구나 기존 원전엔 이 장비가 아직 외국산이 많이 설치돼 있다. D 대표는 “애써 개발한 기술이 사장되지 않도록 한국수력원자력이 국산 장비로 교체할 길을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며 “원전 유지보수 업체들은 우리처럼 알아서 살길을 찾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유지보수는 건설설계보다 규모가 작다. 가령 배관 분야 유지보수 일감은 많이 수주해야 1년에 10억원 정도다. B 부사장은 “가동 중 원전 일감만으론 인원을 10명 미만으로 줄여야 한다”며 “신규 설계가 있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유지보수 일감마저 줄고 있다. 원전설계서비스업체의 E 전무는 “공기업들이 하도급 물량을 줄이면서 그마저도 경쟁을 붙이는 바람에 어려운 와중에 업체들끼리 이전투구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건설설계와 유지보수 기술자들은 원전에서 ‘한 식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이젠 적대감마저 감돈다. A 부사장은 “주로 신규 원전 일을 해오다 일감이 없어 가동 원전 쪽 일을 수주하려 하니 기존 업체들로부터 밥그릇 빼앗는다는 비난을 듣는다”며 “회사는 살려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숨지었다. C 사장은 “화력발전 진출까지 고려해봤지만, 이미 기존 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쉽지 않다.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수출 성사돼도 납품까진 5년 

한국원자력기자재진흥협회가 지난 5, 6월 120여개 회원사를 대상으로 원자력사업 부문 축소 여부를 조사한 결과, 내년까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응답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부지도 확보돼 있고 설계가 초기 단계까지 진행됐는데, 갑작스런 정책 변경 때문에 일방적으로 중단됐기 때문이다. 건설 재개가 안 되면 원자력사업을 접겠다는 업체가 대부분이라고 협회는 설명했다. 이는 결국 가동 중인 원전의 부품 수급 불안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

일각에선 원전 수출로 먹고 살면 되지 않냐 하지만, 수출 계약이 성사돼도 실제 납품까진 적어도 4, 5년이 걸린다. 그 사이 신규 일감이 없으면 업체들은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B 부사장은 “신한울 3, 4호기를 짓는 동안 잠시 숨통이 트이면 이후 원전을 더 짓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출구전략을 마련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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