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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한일 격차 600년, (8) 장기 방치된 배경

입력
2018.12.21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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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격차 600년의 생성ㆍ확대와 관련한 7차례 연재물에서 지적한 문제나 현상이 시정되지 않고 장기 방치된 원인 내지 배경을 살펴보자. 주목할 점은 이들 이슈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차별적 신분제, 낮은 농업생산성, 상공인 박대, 말뿐인 민생 우선, 약한 분권ㆍ공익 추구라는 문제점의 이면에는 강도높은 개혁이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리고 개혁이 드물고 약했던 배경에는 리더층의 편협한 세계관 등이 있다.

시리즈 첫 번째에서 다뤘듯이 리더층의 세계관은 나라나 조직의 흥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성과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인생 성공방정식에 따라 ‘노력X능력X사고의 방향성’으로 정해진다고 가정해보자. 19세기 후반 쇠퇴 후 망국에 이른 조선, 20세기 후반 그룹이 해체된 한보ㆍ대우의 사례는 리더층의 세계관이 시대에 뒤지거나 잘못되어 나라, 조직의 성과가 개인 성과의 단순 합보다 훨씬 작아진 경우다. 이하에선 조선 지배층이 사고와 상황 판단, 정책 대응에서 어떤 오류를 범해 한일 격차가 해소되기보다 장기간 유지되고 확대되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유학 이념에 입각한 통치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과신이다. 유학의 가르침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유무형의 굴레를 씌워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데, 그 가르침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면서 유학, 즉 도학 정치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 지배층의 머리를 사로잡는다. 임진ㆍ정유전쟁과 정묘ㆍ병자전쟁이라는 거대 국난에도 국체가 유지되자 백성의 눈높이와 거리가 먼 이런 사고와 통치의 흐름은 한층 강화된다. 동학농민전쟁 이전 항쟁다운 항쟁이 거의 없고 각종 반란이 조기 진압된 것이 이를 간접 입증한다.

둘째,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위협이 가시화한 시점까지도 조선 지배층은 신 지식과 정보에 대해 사실상 까막눈 상태였다. 강한 쇄국 조치로 무역과 인적 교류, 서구 학문과 서적에의 접근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통치 기반 구축에 따른 값비싼 댓가라고 볼 수 있다. 발달한 서구 등 바깥 세계의 학문과 기술 정보가 장기간 차단되면서 백성은 우민화하고 전문가층이 제대로 육성되지 못한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중국과 일본 방문기 외 우리 선조들이 쓴 외국 관련 저작이 거의 없고, 이들이 쓴 과학 기술 등 전문 분야 서적도 역서를 포함해도 극소수다.

셋째, 왕 등 최고 지도자 주변의 유력 관료와 학자층의 상황 인식이 느슨하여 누적되어온 문제점을 고치고 새로 확인된 국내외 격차를 해소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약했다. 노비제와 서얼차대제 타파, 수레ㆍ수차의 보급 통한 농업생산성 제고, 민생 안정과 개선 위한 대책, 지방관 임기 연장과 권한 증대 등 분권 강화, 상인과 장인에 대한 대우 개선 등의 필요성을 한 때 주장한 이들은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실현시킨 이들은 별로 없다. 반대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나라를 멍들게 한 사례로는 세종대 허조 등에 의한 노비제 개악인 천자수모법으로의 회귀 등이 있다.

넷째, 지배층의 지적 호기심과 책임감이 약해 사회를 응집시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유학에의 과도한 경주(傾注)와 쇄국의 영향 등으로 중국 외 국가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개화기에 서구권 국가와 일본이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할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이는 일본의 지배층인 무사들이 근대 진입을 앞두고 중국과 서구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련 정보를 선제적으로 입수ㆍ학습하여 자국에 대한 서구측의 개방 압력에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혼란을 최소화한 것과 대조된다.

다섯째, 벼려 왔던 개혁 작업을 선두에서 지휘하여 개혁의 수용도를 높일 ‘얼굴이 보이는 개혁가’가 몇 없었다. 조선시대에 행해진 대표적 개혁인 대동법과 균역법 시행에서 책임감있게 추진한 신하의 이름이 복수 거론되지만, 이들이 당시 백성의 뇌리에 명확하게 각인된 개혁의 주도자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렇다 보니 두 법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 작업은 근본적인 개혁과 거리가 있다. 실제로 시행 후 얼마되지 않아 다양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개혁 효과가 떨어진다. 이는 에도 시대에 추진된 여섯 차례 개혁이 정도차는 있지만 얼굴이 보이는 개혁가 주도하에 일정한 성과를 내어 무인 통치기 일본 역사의 품격을 높인 것과 비교된다.

정리하면 유학 이념에의 몰입과 도취에서 끝내 깨어나지 못해 자주적 개혁에 실패한 조선 지배층은 그렇지 않았던 일본 지배층과 대조된다. 다행히(?) 국권 피탈ㆍ국토분단ㆍ한국전쟁ㆍ미군정으로 이어진 미증유의 외부 충격 덕분에 우리는 유학의 굴레와 멍에를 털어낸다. 20세기 전반 쓰라린 실격의 역사기를 거친 후 지난 60년 사이에 잠재된 민족 의식과 능력을 일깨우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와 행동을 펼쳐 오랜 한일 격차의 축소ㆍ해소에 성공한다. 이젠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의 경과를 되새기고 성찰할 시점이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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