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청원ㆍ서명운동으로 윤창호법 통과 이끌어내
“처벌 수위 반토막 아쉬워… 제2 윤창호법 준비”
‘아깝지 않은 목숨’이란 게 세상에 있을 리 없지만, 어떤 죽음은 생전의 꿈이 너무나 찬란해 누구라도 붙잡고 ‘하필이면’이라고 따지고 싶어진다. 친구들에게 창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음주운전은커녕 함부로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도, 무단횡단을 하지도 않는 청년.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면 그가 능히 해냈을 일들이 짐작되고도 남아서 그 목숨이 아깝고도 아까운 친구. 윤. 창. 호.
9월 25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181%의 만취자가 몰던 BMW 승용차에 치여 스물두 살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 고려대 행정학과 재학생으로 카투사 미2사단 지역대에 복무하던 중 고향인 부산 해운대로 휴가를 나온 참이었고, 오랜 친구랑 저녁을 먹은 뒤 ‘잘 들어가라’고 막 헤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의식을 잃고 해운대백병원에서 46일을 버티던 청년 윤창호의 몸은 11월 9일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윤창호’라는 이름 석 자를 딴 법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음주운전 사망 사고를 ‘살인’으로 보고 그 처벌 수준을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최고 무기징역 또는 3년 이상 징역’으로 높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통과시킨 것은 김민진 이영광 손희원 손현수 이소연 박주연 김주환 윤지환 진태경 예지희 이렇게 고인의 친구 10명이다. 중고등학교 동창부터 대학교 친구까지 저마다 학연과 지연은 달랐지만 ‘창호의 친구’라는 명분 하나로 모여 한마음 한 뜻으로 지금의 결과에 이르렀다.
현재는 제각각 지내는 곳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나 경찰의 음주단속 캠페인 동원 등 그들을 필요로 한다면 시간이 되는 사람 누구라도 발벗고 나선다. 18일 부산 사고 현장에서 만난 윤지환(22) 예지희(22) 이소연(22)씨는 각각 창호의 중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십 수년간 국회가 해내지 못한 일을 단 3개월 만에 해낸 의젓한 청년들이지만, 문득 “근데 있지, 실은 나는 아직도 창호가 떠난 게 실감이 안 나”라고 말하며 울적해할 때는 한없이 앳돼 보인다.
친구들이 슬픔에 젖어있는 대신 행동하기로 결심한 것은 전적으로 창호씨 덕이다. “어느 날 다같이 침통하게 병원에 모여있는데, 누군가 ‘창호라면 이럴 때 당장 피켓 들고 국회를 찾아갔을 텐데’라고 한 게 시작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창호는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이 생길 때 좌절하기보다 그걸 변화의 계기로 삼을 사람이 분명하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창호라면 했을 일을 대신 하자.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저희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이 일을 해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창호의 친구이기 때문에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던 거죠.” 친구들이 함께 사용하는 단체카톡방에는 여전히 창호씨 이름이 포함돼 있다. ‘함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누군가는 국민청원에 올릴 글을 작성하고, 누군가는 국회의원에게 메일을 보내고, 누군가는 시민들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지난 3개월 숨가쁘게 달려왔다. 90일 남짓 짧은 기간에 법안 통과와 시행이라는 값진 결과를 마주하기는 했지만, 손쉽게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학업과 병행하는 게 무리라는 판단이 든 친구는 휴학을 하기도 했다.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면서 악성댓글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굽혀지지는 않았다. “언젠가부터 많은 음주운전 피해자들이 저희에게 연락을 해와요. 저희가 그분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법이 시행됐다고 해서 할 일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초 계획했던 △법 통과 △인식 개선 △예방 정책 △가해자 엄중 처벌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직은 아쉬움이 크다 “최초 제안에는 징역형을 최소 ‘5년’ 이상으로 하자고 담았는데 그게 결국 통과가 안됐어요.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은 거죠. 반 쪽짜리 법안인 셈이에요.” 이 때문에 ‘제2의 윤창호법’도 준비 중이다. 내년 초에는 양형위원회와의 만남도 준비돼 있다.
창호씨 친구들이 다같이 운영중인 블로그 이름은 ‘역경을 헤치고 창호를 향하여’다. 평소 창호씨가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로 해놓을 만큼 좋아했던 문구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에서 따왔다. 창호씨의 대학 친구이자 ‘윤창호와 친구들’의 구심점인 김민진(22)씨는 추도사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역경을 헤치고 너의 이름 석 자가 명예롭게 사용될 수 있도록 움직일게”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운전대를 잡기 전 단 한번이라도 창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바란다. 지금 당장 속단하기 이를지 모르지만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안간힘,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변화는 시나브로 온다.
부산=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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