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2019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이 생을 다시 한 번’

입력
2019.01.01 04:40
0 0
일러스트= 김경진기자
일러스트= 김경진기자

등장인물

조은태 남 30대

진고운 여 현대 : 20대 / 전생 : 10대

유 경 남 현대 : 30대 / 전생 : 10대

전생 조은태 남 30-40대

막 오르면

유 경, 포박된 조은태를 무대 앞으로 끌고 나와 내팽개친다.

무대 중앙에 삽질을 하는 유 경, 무덤을 파는 것이다.

조은태, 도망치려다가 유 경에게 번번이 가로막힌다.

유 경 역시, 인생은 갈등이지. 또 보네 반갑게.

조은태 왜 이래요 또! 돈 다 갚았잖아, 보름 전에!

유 경 ... 자식 노릇 하자.

나보다 더 니네 아버지 소식이 늦으면 어떡해.

유 경, 품 안에서 종이 꺼내 조은태 앞에 펼친다.

유 경 그 인간이 자필 서명한 차용증.

조은태, 소처럼 유 경에게 달려들고

유 경, 종이를 가지고 투우사처럼 조은태를 피한다.

투우 같은 몇 번의 몸싸움.

조은태 갚을 능력 안 되는 사람인 거 알면서 돈을 빌려줍니까?

유 경 눈물로 호소하는데 별 수 있나. 일단 빌려주고 너한테 받는 수밖에.

슬프지만 어쩌겠어. 억울하면 나라를 욕해. 대한민국 법이 그런 걸.

가족주의 가족중심 가족책임. 세상에서 가장 큰 족쇄는 뭐다? 가족.

조은태 난 더 못해 그 인간 잡아 족쳐!

유 경 하긴, 너 정도면 나라에서 변제해주는 게 맞긴 하지.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하고 노가다 판에서 굴러,

마이너스의 손인 아버지 빚 갚느라 쎄가 빠져...

근데 결혼? 빚은 어쩌고. 애인은 뭐래?

조은태 (무릎 꿇고 애원하는) 아니... 안 돼요... 걘 몰라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죽으라면 죽고

그 각서대로 할 테니까 제발...

유 경 아이고 세상에나. 아직 말을 못했구나. 그래서 내가

... 모셔왔지.

유 경, 들여보내라고 손짓.

떠밀리듯 입에 재갈 물리고 포박된 진고운이 떠밀려서 무대에 나동그라진다.

유 경, 진고운을 일으켜 세워 조은태와 사이 두고 앉히고 재갈 풀어준다.

자신과 조은태 사이를 보고 발악하며 비명 지르는 진고운.

유 경 겁먹지 마 아가씨. 여기 들어갈지 말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진고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조은태 내 여자한테 손대지 마!

진고운 ... 자기야! 이 사람들 뭐야, 아는 사이야?

유 경 눈물 난다.

죄송해요 아가씨. 나 이런 사람 아닌데 그쪽 예비신랑이 나를 자꾸

비매너로 만드네. 각서 쓴데요. 신체 포기 각서.

진고운 네?

조은태 듣지 마 고운아.

진고운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요. 이거 공갈협박에 살인미수에요!

경찰 불러요!

조은태 안 돼!

소용없어...

진고운 뭐?

유 경 자,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얘가 지금 결혼을 한다네. 지 인생 통째로 담보 잡힌 줄도 모르고.

진고운 네?

유 경 얘네 아부지가 얘 걸고 돈 빌려서 튀었어요.

진고운 자기야... 이게 무슨 소리야...

유 경 이럴 수가. 아무것도 몰랐구나 진짜.

아가씨, 충고할게. 지금이라도 도망쳐.

내 살면서 이 새끼처럼 인생에 마가 낀 인간은 처음 봐.

하는 족족 다 안 돼 모든 게 태클이야.

(사이)

이 생활 10년 찬데 딱 하나 배운 게 뭐냐면요,

이런 우울한 인생은 참 흡입력이 강해. 무지막지한 진공청소기랄까.

마주친 인연 하나도 허투루 안 흘려. 그냥 다 빨아들이지. 그럼 바로 그냥 블랙홀. 오호 통재라, 불행들 사이에 또 다른 불행성의 탄생.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진고운 이해가 안 돼, 이게 다 무슨 얘기야...

조은태 미안해.

진고운 ... 미안하면 다야 이 개자식아!

유 경 안 됐다. 그래도 어떡해. 미안하면 죽어야지.

조은태 미안하면, 죽는 거야...

조은태, 그대로 투신.

진고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잠깐만요... 안 돼!

진고운, 조은태를 따라 나간다.

유 경, 삽을 들고 선다.

유 경 살다 살다 얘처럼 인생 안 풀리는 인간 처음 봐요.

희한한 게...

내 친구 중에 미국 저 실로폰벨리 가서 완전 성공한 애 있거든?

걔도 이름이 조은태야.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어떤 앤 하는 족족 다 잘되고

어떤 앤 뭐 시작도 못해보고 다 무너져.

마지막도 이따위로... 참 암담한 인생.

무대 어두워지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

그 속을 걸어오는 조은태.

그의 앞에 바닥에 앉은 한 노파.

조은태 저기요. 여기가 어딘가요. 저 여자친구한테 가야되는데요,

노파 도와주시오.

조은태 어, 할머니. 종로 피맛골 입구에서 껌 파시는. 저 아시겠어요?

저예요 3만원. 꼭 3만원어치 산다고 저만 보면 3만원 그러셨는데.

노파, 양손을 뻗는다.

조은태, 노파 앞에 가서 등을 내밀어 노파를 업는다.

조은태 파출소로 가요.

노파 참 불쌍타. 아무리 쌓아도 공이 되는 구나 공덕이.

원망스러웠을 게다.

조은태 말해 뭐해요. 네?

노파, 조은태의 앞을 등불로 막는다.

노파 네 이름 아래 주어졌으나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삶.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붙는 저주.

네 삶을 바꿔보지 않으련?

조은태 혹시 악마세요?

(반가운) 왜 이제 왔어요 영혼 걸게요.

아니면 뭐, 내 삶에 5년 드려요? 10년? 언제를 원해요.

노파 지금.

사이.

E 일천구백이십구년 10월 30일. 일본 학생들이 조선의 여학생들을 추 행하는 사건이 발생. 일본은 전격적으로 조선 학생들을 탄압. 일본 학생무리가 조선인 학생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해 조선 학 생들의 항일운동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11월 11일.

무대에 나무통으로 만든 책상,

오래된 알전구. 가늘고 여리게 불 들어온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조은태.

보자기를 안고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여학생 진고운,

교복에 모자까지 쓴 남학생 유 경이 들어온다. 유 경은 한쪽 다리를 전다.

유 경, 들어오면서 알전구를 다시 한 번 살핀다.

유 경 오늘따라 더 위태위태하네.

진고운 불이 켜지는 게 감지덕지야.

유 경 참 친근하다, 이 알전구. 꼭 우리 같다.

10월 3일 고조선 건국절에도 천황 생일이라고 기미가요나 불러야 하는 신세. 대한 조선 내 나라에서도 조선인이라고 핍박받는 신세.

진고운 아프다.

유 경 약소 민족 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 만세!

진고운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진고운, 보자기를 풀어 알전구 아래 책상에 놓는다.

보자기를 푸르면 나오는 종이들.

진고운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유 경, 만세를 부르다가 조은태에 걸려 넘어진다.

조은태, 깨어난다.

유 경 (비명) 뭐, 뭐가 있어!

유 경, 다급히 알전구를 돌린다.

조은태 아이고 머리야.

조명, 밝아진다.

진고운 누구야!

유 경 너, 너 이 변절자!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유 경, 조은태를 알아보고 의자를 번쩍 들어 내리치려 한다.

진고운, 빗자루 끝을 잡고 조은태를 위협한다.

유 경 내 다리 하나론 부족했나?

진고운 어떻게 알고 숨어들었나, 경무국의 더러운 쁘락치야!

유 경 (의자를 던지고 조은태 멱살 잡는다) 또, 누구 인생을 조졌나 이 괴 물아!

조은태 잠깐, 잠깐만!

무슨 말입니까? 쁘락치라니! 난 그저 할머니 따라왔을 뿐인데.

할머니 못 봤어요?

유 경 살려는 변명이다. 헛소리 마!

진고운에게서 빗자루 받아든 유 경, 조은태에게 휘두른다.

조은태, 유 경을 피해 뒹군다.

진고운, 서둘러 종이를 모아 보자기로 감싸는데 종이들이 바닥에 흩날린다.

조은태, 엎드린 채 종이를 보는데

진고운, 조은태 앞의 종이를 낚아챈다.

진고운 절대 못 찾을 거야! 당신이 찾는 이름들!

조은태 ... 이게 무슨 글자야 한글이야?

유 경 닥치라고!

진고운, 조은태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나무통 뚜껑을 열어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조은태를 겨눈다.

조은태 살려줘.

진고운 살고 싶어?

조은태 오해야. 내가 무슨 쁘락치야, 채무자지. 잘못했어. 살려줘.

진고운 우리도 그랬어! 우리도 살고 싶었어,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우리를 버러지로 취급한 게 누구지?

조선인 학생들을 잡아서 심문하고 학대하고...

당신도 조선인이면서! 그런 인생으로도 살고 싶다니 참으로 딱하다.

(사이)

진고운 날 원망하지 마.

원망할 거면 어제의 너를, 그제의 너를, 총독부에 붙은 너를, 노덕술 아니 마쓰우라 히로의 쁘락치인 너를,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비정한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너를 원망해.

조은태 무슨 소리야, 나는 돈 빌린 죄밖에 없잖아! 갚겠다고! 여자친구까지 잡아와놓고 진짜 왜 이래!

이젠 그냥 날 죽이래? 돈 필요 없대? 유 경 불러, 유 경 부르라고!

진고운 너 이 쓰레기한테 돈 빌려줬어?

유 경 내가?

유 경, 진고운의 손에서 총 빼앗아 조은태를 향해 조준한다.

조은태,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든다.

유 경 그랬다면 이 새낀 죽었겠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목숨을 받았을 테니까. 그 더러운 입에 내 이름 올리지 말고 그냥 죽어 이 새끼야.

조은태 그래, 죽여. 죽여라. 와. 내가 진짜.

그래 뭐. 내 주제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죽여 그냥. 잘 됐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어. 맨날 공사판 노가다 뛰고 그래도 아부지 빚 갚 고 나면 겨우 팔천원 손에 쥐고. 골방에 살면서도 공과금 한 번 안 밀린 적이 없고 맨날 월세 못 내서 보증금 다 깎이고 쫓겨나고... 그 래도 어떻게든 사랑해보겠다고, 어쩌다 일당에서 빚 까고 만오천원 만 쥐어도 좋다고 노량진 갔다. 공시생 여친 만나 컵밥이라도 한 끼 먹겠다고. 그렇게 살았다 내가.

제발 부탁이니 죽여줘라 좀!

(사이)

조은태 나 죽이고 고운이 놔 줘라. 걘 아무 잘못 없어. 아무것도 몰라.

나 같은 새끼도 사람이라고... 사랑해준 죄 뿐이다 걔는!

고운아 진고운. 내가 많이 사랑했다. 나 같은 거 잊고, 행복해라!

(사이)

유 경 진고운?

진고운 이봐,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내 이름 알아? 유 동지 이름은 어떻게 알고!

유 경 진동지, 그 놈에게서 떨어져.

진고운 뭔가 이상해. 팔천원... 만오천원... 만오천원이면... 기와집을 사고도 남아. 이봐 당신, 한글이 이상하다 그랬지? 이거 읽을 수 있어?

조은태 죽여 그냥!

(사이)

조은태 한글 맞아? 맞아... 기역 니은 디귿... 뭐라고 쓰여 있는 건데...

잠깐, 1929년... 1929년...?

뭐하는 거야... 이젠 나를 미치게 만들 작정이야?

진고운 ... 당신, 누구야...

유 경 누군지 알아서 뭐 하게. 이 인간을 믿어? 민족을 판 반역자를?

놔주면 안 돼. 처단해야 돼.

다음번엔, 필시 우리를 죽이려 들 거다.

유 경, 매달리는 진고운을 뒤로 하고 조은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그 때, 유리병이 또르르 굴러온다.

조은태 엎드려!

조은태, 진고운과 유 경을 보호하며 포복한다.

유 경 저리 비켜!

진고운 뭐야?

조은태 둘 다 물러 서!

진고운, 유 경, 조은태가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조은태, 조심조심 가서 보면 유리병이다. 집어 드는데

낚아채는 유 경.

조은태 위험하다고!

유 경 밀서다. 장 형이 보낸 거야.

진고운 왜?

유 경 큰일이다.

진고운 (받아서 읽는) ‘화재로 등불하나는 피신. 머물 곳이 없다.’

그럼 유인물은?

유 경 전부 오 형네서 인쇄할 수는 없어.

진고운 가져오자.

유 경 가능해?

진고운 우리끼린 힘들겠지. 하지만.

유 경 안 돼.

진고운 봤잖아, 이 사람은 우릴 구하려고 했어.

유 경 이해가 안 돼. 이봐, 방금 왜 우릴 덮친 거야.

조은태 여기 어디야.

진고운 광주.

조은태 1929년이 맞아?

유 경 그래.

조은태 일제강점기?

진고운 일제강제점령이란 뜻인가?

조은태 민족을 팔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내가 그랬다고?

유 경 그래. 당신은 일본 앞잡이야. 친일파.

조은태 니 다리는 내가 그랬고?

유 경 (끄덕인다)

조은태 ... 이름은?

진고운 조은태.

조은태, 실소한다.

진고운과 유 경, 조은태를 바라보다 서로 시선 교환한다.

조은태 그랬구나... 이제야 내 삶이 왜 그렇게 엿 같았는지 알겠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와... 이건 그냥... 내가 죽어야지. 그렇게 친일 파를 욕했는데 내가 친일파래. 매국노라니...

멀쩡한 사람 인생도 망쳐놓고 내가...

죽어야지 왜 살아. 억울할 것도 없다. 그냥 죽자.

조은태, 총을 든 유 경에게 달려든다.

총을 뺏기지 않으려는 유 경과 투우하듯 몸싸움.

진고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진고운 그만.

조은태 제발 부탁이다. 그냥 죽여. 죽고 싶다 진짜로. 진심이야. 나도 내가 이렇게 삶에 의지가 없는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면 그냥... 더 살래 도 싫다. 내가 싫어. 그냥 끝낼게. 나를 쏴라. 사람 하나 구해준다 치고 쏴.

진고운 아뇨.

당신은 조은태가 아니야. 이 세상의 조은태가 아니야.

(사이)

조은태 아니, 난 조은태다 개망나니 친일파 매국노 조은태!

진고운 내 말이 맞지?

유 경 믿을 수가 없어...

진고운 친일파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유 경 이 사람은 대체 누구야.

진고운 누군진 중요하지 않아.

어쩌면, 이 사람은 불씨야, 하늘이 내려준.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 독립이란 화약고에 불을 붙여줄 불씨.

유 경 ... 위험한 사람이야.

진고운 이봐요 아저씨.

조은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허망하다.

진고운, 조은태의 옆으로 간다.

진고운 아저씬 쓰레기가 아니에요.

조은태 뭐...?

진고운 꼭 좋은 사람일 필요 있나요. 나쁘지만 않음 되지. 안 나쁜 아무나 면 돼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가 되고 역사가 돼요. 아저씬 그런 사람이에요. 안 나쁜 아무나.

조은태, 무너진다.

진고운, 조은태를 다독인다.

유 경, 숙연해진다.

조은태 뭘 원해.

진고운 당신의 지금이요. 더해주세요. 이 나라를 위해.

사이.

진고운과 유 경, 둘이 보자기로 덮어씌운 상자를 함께 들고 조심조심 걷는다.

앞에 나선 조은태.

조은태 거 좀 쉬엄쉬엄 해. 날세 경무국 조은태.

화재현장에 아무것도 없었다던데? 폭삭 주저앉아서 형체도 없다며?

쌀쌀하니, 흰 국물이 땡기네.

몸 좀 데우는 게 어떻소?

(사이)

조은태 자 한 잔 받으시고. 건배.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하야”

오늘따라 술이 참 독허네.

어린 아해들이 무엇을 알아 그리했겠소.

이런 생각도 한다오.

아해들은 모두가 귀한 것이오. 각기 다른 반짝이는 하나의 세계라 오. 그런 아해들의 눈을 키워주는 것이 어른의 몫 아니겠소. 시월 삼십 일의 일은 참으로 마음이 요상했소. 어찌 내지의 아해들 은 희롱을 즐겨하는가.

(사이)

조은태 아니 그들을 편든다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보시오. 사촌누이를 남정네 여럿이 희롱한다면 그 누가 옳구 나 하고 넘어가겠냐 이 말이오. 뭐, 내지 아해 오십이 조선의 서른 명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도하오... 아니, 너무 극심한 실망에서 나온 단어니 언짢아 마시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리다.

(사이)

조은태 맞소.

(사이)

조은태 (점점 슬퍼진다) 아니외다, 오늘따라 술이 참 다네.

조선이, 어찌, 본토를, 이긴단 말이오.

조선으로선 대일본제국의 은혜를 입어 무척이나, 감사하오.

조은태, 무릎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는다.

조은태 영광이 아니겠소.

조은태, 다시 머리를 박는다. 흐느낀다.

진고운과 유 경, 사라진다.

사이.

알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처음보다 선명하다.

유 경 붕어눈깔. 못났다.

조은태 어른한테 눈깔이 뭐냐.

진고운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유 경 내가 언제.

조은태 잘 봐둬. 알전구는 이렇게 가는 거야.

조은태, 갈아 끼운 알전구를 책상 위에 놓는다.

책상 위에 보자기에 덮인 물건이 놓여있다.

조은태 이거냐?

진고운 네.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

조은태 너무 거창하면 부담스럽다 얘들아.

유 경 우리 동지들의 목숨이오. 충분하죠.

유 경, 보자기를 벗긴다.

등사판이다.

진고운 아저씨. 한 번 밀어 봐요.

조은태 내가?

유 경 야.

진고운 자격 있어.

조은태, 머뭇머뭇 다가가서 밀대 잡고 밀어본다.

유인물이 하나 완성된다.

조은태, 한 장 한 장 잘 민다.

유인물들이 점점 는다.

진고운과 유 경, 시간차를 두고 떠난다.

점차 푸른빛이 돌고 닭 울음소리가 울린다.

진고운과 유 경, 들어온다.

진고운 아저씨 혼자 이걸 다 했어요?

조은태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진고운 이쯤이면 오백 장 훨씬 넘겠는데요?

조은태 어떡할 생각이야?

유 경 11월 12일. 역사는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할 겁니다.

독립을 꿈꿨던 학생들의 정신은 찬란했다고.

진고운 등교합니다, 자연스럽게.

(유인물 뿌리는 시늉) 흩날리는 거죠, 아름답게.

진고운, 보자기에 유인물 나눠 보따리를 두 개로 만들어 하나는 맨다.

진고운 다녀올 거에요.

조은태 몸조심해.

유 경 댁은요.

조은태 글쎄다.

진고운, 주머니에서 주먹밥을 꺼내 내민다.

진고운 새벽에 쌌어요. 배 곪지 말라고.

조은태 해장엔 라면인데.

진고운 네?

조은태 아냐, 고맙다고. 잘 먹을게.

(사이)

조은태 빛이 드네.

유 경 해가 떴으니까.

진고운 이 땅에 드는 빛이에요. 오래 머금을, 빛.

조은태 잘 지내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고.

진고운과 유 경, 나가다가 돌아본다.

유 경,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와 조은태를 끌어안는다.

조은태 잘, 살아라.

유 경 (조은태 등을 툭 친다)

진고운, 조은태와 유 경을 같이 포옹한다.

꼭 끌어안은 세 사람.

사이.

총소리.

조은태, 진고운과 유 경을 뒤로 돌려세우고 자신이 방패가 된다.

알전구가 팟, 꺼진다.

일시적인 암전.

문 열리고 점점 밝아지는 내부.

진고운과 유 경, 구석에 숨어있고

팔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조은태,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본다.

사복 입고 헌팅캡 눌러쓴 사내 조은태가 등지고 서서 총을 들어 이 생의 조은태를 겨눈다.

조은태 너구나.

전생조은태 어디 숨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이 쥐새끼 같은 놈.

내 얼굴을 하고 반역모의를 해?

... 나라도 속겠네.

이야. 대단하구만.

전생조은태, 총구로 조은태의 뺨을 쓸어내린다.

조은태, 전생조은태의 뺨에 손을 댄다.

전생조은태 어디다 손을 대!

전생조은태, 총을 난사하고

조은태, 총 피하며 책상을 들어 막아선다.

전생조은태, 조은태의 뺨을 친다.

전생조은태 기다려. 지금은 네 놈이 아니야. 저 연놈들부터 족친 다음에...

조은태 상상 그 이상. 진짜 역겹다.

전생조은태 죽여주마.

조은태 쏴주라, 소원이다.

내 얼굴로 내 이름으로 ... 더러운 짓 하는 거 못 보겠다.

조은태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전생조은태.

전생조은태 네 놈들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거야.

조은태 내 소개를 안 했지.

이 다음 생에 너는 내가 된다.

(사이)

전생조은태 (발끈하여 총구를 조은태에게 위협적으로 들이민다) 개소리다.

믿을 수 없다. 재수 없게 나랑 닮은 불령선인.

조은태 (다가선다) 눈썹 옆에 흉터. 눈 밑에 점. 목 뒤에 사마귀. 징글맞게 똑같네. 야, 너 잘 서냐?

조은태, 멍한 전생조은태를 급습해 쓰러뜨린다.

진고운과 유 경도 놀라서 마주본다.

조은태, 재빨리 총을 집어 전생조은태를 눕히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댄다.

조은태 인생은 갈등이라더니, 맞네. 지루할 틈이 없다.

전생을 저주하는 이생이라.

전생조은태 나 하나 죽는다고 달라질 세상인가?

그런 통쾌한 역전극은 현실에선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조은태 그 말이 맞아.

그래도 내 인생은 바꿀 수 있겠지. 내 모든 시작은 너니까.

전생조은태 이봐. 진정해. 같이 여기서 나가자.

시궁창 인생, 내가 구해줄게. 집도 주고 땅도 줄게.

나는 경무청 소속 ...

총을 하늘에 대고 쏘는 조은태.

조은태 좀 잘 살지 그랬냐. 내가 너 잡으러 여기까지 와야겠어?

내 인생 고쳐보겠다고?

전생조은태 내가 다 해주마. 어떻게든 살려줄게. 그러니 ...

조은태 미친놈.

나라 잃고 뭐 어떻게 사는데?

아무리 지옥이라도,

내 인생 거지같고 분단돼서 남북으로 갈린 조국에 살아도

나는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내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나라에 요구할 수 있는

내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전생조은태 살려줘. 나도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어, 나라를 위해...

조은태, 전생조은태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둘의 몸싸움 끝에 전생조은태의 미간에 총구를 대는 조은태.

두 손을 번쩍 든 전생조은태.

조은태 (전생조은태를 거울 보듯이 들여다본다)

보고 있는 게 사람인지 괴물인지

신이 아무리 손을 잘못 놀렸어도 이렇게까지 끔찍할 순 없어.

이것이 정말로 내 전생이라면 이 몸이 사지가 멀쩡한 것에 감사할 정도야...

총을 들어 전생조은태를 겨냥한다.

진고운 (조은태의 팔을 잡는다) 안 돼요!

조은태 저리 가라, 위험해.

진고운 제발 부탁이에요. 아저씬 아니잖아요 아저씬 안 나쁜 아무나잖아요.

내가 알아요.

전생조은태 잘 생각해봐. 여기서 내보내주면 너희 셋은 보호하겠다. 약속해.

유 경, 흥분해 전생조은태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전생조은태, 돌변해 유 경과의 몸싸움을 한다. 유 경을 인질로 잡는다.

조은태 풀어줘.

전생조은태 이 자식 숨통 끊어도 돼?

진고운 유동지!

유 경 오지 마!

총 내려놔요. 우리는 저들과 달라요. 같아선 안 돼요.

전생조은태 존경스런 동지애네.

살리고 싶으면 총 버려. 어서!

네 놈도 이것들이랑 같이 종로에 목이 내걸릴 영광을 주지.

조은태 네 손이 빠를까 내 손가락이 빠를까.

(사이)

전생조은태 시험해볼까. 난 손이 참 빨라.

조은태 ... 애들은 내보내.

유 경 안 돼요.

전생조은태 좋아. 차분히 얘기해보자고. 우리 둘이. (유 경을 툭 민다)

조은태 나가.

진고운 잠깐만... 아저씨... 진짜예요? 남북으로 나뉘는 거? 지옥인 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독립된 조국이 어떻게 그래요.

조은태 나가라고!

유 경 이대로는 못 가요! 들어야겠어요.

조은태 댁들 잘못이 아냐. 여기서 나가 당장!

진고운 아저씨 잘못도 아니에요 아저씨도 잘못 없어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요 제발.

조은태 빨리 가!

진고운 (유 경에 끌려 나가며) 있잖아요...

그러지 마요 아저씨. 죽이지 마요. 죽지도 말고.

사세요. 살아서... 안 나쁜 아무나가 되세요. 역사가 되세요.

전생조은태 (조은태에 달려들며) 밖에 불령선인들 검거해!

서로 총을 가지려 다투는 두 사람.

전생조은태, 총을 손에 넣고 조은태를 향해 조준한다.

전생조은태 제물이 돼주어 고맙소, 가짜 조은태 선생. (총구를 당긴다)

총소리.

총은 조은태가 맞았는데 맞은 부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건 전생조은태.

조은태 그러니까, 진작에 잘 좀 살라니까...

그와 동시에 조은태도 쓰러진다.

긴 사이.

노파, 바닥에 앉아있다.

조은태, 걸어 나와 노파에게 간다.

노파 왔어? 3만원어치 줄까.

조은태 네.

노파 아니야, 만원어치만 사. 애끼며 살어. 오래 살어.

조은태 네... 감사해요.

조은태, 나가고

노파, 정면을 본다.

노파 껌 사. 안 나쁜 아무나들아.

<막>

차인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