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서울 성동구 아름다운가게 서울그물코센터에 그림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8절 크기 도화지엔 가족을 표현한 앙증맞은 그림과 함께 ‘사랑헤(해)요’ ‘베지(메리)크리스마스’ 등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남준서(6), 준혁(3) 형제. 편지는 옷과 장난감, 인형 등 형제가 고른 기부 물품과 함께 작은 상자에 담겨 왔다. 조상의 아름다운가게 홍보팀 간사는 “과거에는 물품을 기부할 때 정성스럽게 손편지를 써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보기 드물다”라면서 “그래서인지 준서 형제의 편지를 본 직원들이 무척 고맙고 뿌듯해했다”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기부 물품의 수량이 꾸준히 늘었지만 진심으로 남을 배려하는 기부 예절은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 기부 물품 수탁 규모가 가장 큰 아름다운가게의 경우 지난해 전체 수탁 양의 67.6%가 폐기됐을 정도다. 사회복지 단체 관계자들은 처치 곤란한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기부를 선택하는 등 왜곡된 기부 문화를 폐기율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본보 12월 6일자 뷰엔 기사 참고).
그렇다고 세상이 마냥 삭막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가뭄에 콩 나듯, 드물기는 해도 기부 물품과 함께 손편지를 보내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가게와 굿네이버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으로부터 기부 손편지를 입수해 살펴보았다.
기부자들이 정성껏 써 내려간 손편지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아이들의 그림 편지. 준서 형제처럼 맞춤법에 구애받지 않고 삐뚤삐뚤 적은 손글씨와 천진난만한 그림이 감동을 더한다. 얼마 전 박스 9개 분량의 물품을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한 김재현(서울 문래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은 ‘좋은 곳에 아름답게 써주세요’라는 문구 옆에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윙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서울 강동구 천호 유치원생 20여명도 ‘우리 옷이 자가저쓰니가(작아졌으니까) 우리가 옷를(을) 줄게. 따뜻하개(게) 옷 이버(입어)’와 같은 다양한 그림 메시지를 기부 물품 상자에 빼곡히 붙여 보내왔다. 서울 영등포구 굿네이버스 본부에도 올해 초 ‘피로한(필요한) 사람에게 잘 전해주세요. 쓰던 거지만 깨끗하게 썼어요’라고 적힌 그림 편지가 상자와 함께 전달됐다. 상자에는 경기 남양주시 도담 유치원생들이 모은 인형과 과자, 학용품 등이 들어 있었다.
손편지까지 써 보낸 이들의 기부 물품은 대체로 상태가 양호하다. 그런데도 편지 문구에는 더 좋은 물건을 기부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담겼다. 물품 수거 직원에 대한 배려심도 묻어난다. 얼마 전 아름다운가게에 의류 68점과 기타 물품 10점을 전달한 익명의 기부자는 수거 직원을 위해 물품 상자 옆에 뜨거운 커피를 담은 텀블러를 놓아두었다. 그는 편지에 “날씨가 너무너무 추운데 드시면서 가세요.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당(다)”이라고 썼다. 한 유명 탤런트는 올해 초 의류 등을 기부하면서 손편지가 든 꽃무늬 봉투를 수거 직원에게 건넸다. 그는 편지에 “아주 사소한 마음 보내드립니다. 제가 지금껏 온 마음으로 아껴왔던 아이들을 보냅니다”라며 잘 알려진 예명 대신 본명을 적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기부 활동을 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를 표시한 경우도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한 정기 후원자로부터 손편지가 도착했다.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아이를 혼자 키워 온 그는 몇 년 전 자신도 암 판정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편지에 “아프고 나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삶을 다시 선물 받았으니까”라며 “너무 적은 후원이라 부끄럽지만 작은 힘이나마 봉사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라고 적었다.
◇10여년 전 손편지에 담긴 기부 예절
아름다운가게는 15~16년 전부터 기부자들이 보내온 손편지를 따로 보관하고 있다. 파일북 5권 분량의 손편지를 읽다 보면 진정한 기부의 의미와 자세를 되돌아보게 된다. 10여년 전 한 기부자는 의류를 보내며 “정장은 드라이했고 다른 옷들은 새로 다 빨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돼 다림질은 못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면서 “물품들이 너무 빈약해서… ㅠㅠ“라며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 또 다른 기부자는 손편지와 함께 배송비라며 천원짜리 지폐 4장을 동봉했다. 편지에는 “제가 보낸 몇몇 물건들이 짐만 되는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 배송비만 써 없애는 게 아닌지 싶어 배송비 4,000원 넣어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의 유품을 기부한 이들의 편지도 눈에 띄었다. 한 기부자는 남편의 유품을 여러 차례 나누어 보내면서 이렇게 적었다. “(불에) 태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라 남편도 기뻐하겠죠. 이번 물건은 겨울옷입니다. 세탁해서 보내드립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혜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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