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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유관순 열사 감옥 동료와 지어 부른 노래, 100년 만에 찾았다

입력
2019.01.01 04:40
수정
2019.01.16 18:3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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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임정 100년-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 8호감방 울려퍼진 “대한이 살았다”

심명철 지사 아들, 두 곡 가사 공개… “진중이 일곱이… 피눈물로 기도”

개성서 3ㆍ1운동 주도했던 권애라 지사가 기존 곡 개사했을 가능성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8호 감방’의 노래 가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이진희 기자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8호 감방’의 노래 가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이진희 기자

서슬 퍼런 일제의 감옥.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끌려들어 온 무명 열사의 몸이 주저앉았다. 그저 공포에 맞서겠다 다짐하건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암시는 숨통을 조여왔으리라. 1919년 3ㆍ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 살풍경의 한 가운데, 우리가 100년 동안 독립운동가라 불러온 이들이 있었다.

한국일보는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이해 연재하는 2019년 연중기획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의 첫 장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한이 겹겹이 서려 있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옥사를 택했다. 개인을 내던진 채 오직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운동가들의 숨겨진 스토리, 그리고 이들의 그늘 아래 묵묵히 사명을 다했던 무명 조력자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의 출발선. 본보는 1919년 3월 1일 이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女獄舍)에 함께 수감된 유관순 외 6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은 공포의 밤을 스스로 달래고 용기를 불어넣으려 옥중에서 만들어 불렀던 창가(唱歌ㆍ노래)의 존재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3ㆍ1운동 주동의 죄목으로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된 유관순, 심명철,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임명애, 김향화. 이 가운데 시각장애 여성 독립운동가 심명철(본명 심영식ㆍ1896~1983) 지사의 아들 문수일(81)씨가 어머니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둔 여옥사 8호 동기들의 노래 두 곡 가사 전문을 본보에 최초 공개했다. 당시 운동가들의 독립을 향한 단심, 그리고 죽음에 꺾이지 않은 용기를 날 것으로 담은 100년 전 곡절의 요체는 ‘대한이 살았다’는 당당한 외침이다.

◇유관순의 8호 감방에서 만들어진 노래

심명철 지사의 생애를 알기 위해 연락한 기자에게 문수일씨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 등 7명이 한 감방에서 노래를 지었고, 어머니(심명철 지사)에게 들었던 가사를 적어놓았다”는 것. 문씨는 지난달 17, 21일 두 차례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자택에서 기자를 만나 두 곡의 가사를 보여줬다.

첫 곡의 가사는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이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등 선교사들이 개교한 미션 스쿨 출신이 많아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던 8호 감방 수감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묘사하고, 괴로움 속에서 기도하며 용기를 모으고자 했던 내용이다. ‘진흙색 일복’은 ‘황토색 일본 옷’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당시 죄수복을 의미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진중이’는 그 뜻이 명확하지 않지만, 죄수를 뜻하는 은어로 많이 쓰였던 ‘전중이’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전중이’가 ‘징역살이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돼 있다.

두 번째 곡의 가사는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이다. 전국에 확산된 3ㆍ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로 표현하고, 독립을 바라는 결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문씨는 “이 곡들을 (어머니와 감옥 동료들이) 수시로 불렀다고 한다”라며 “마음이 힘드니까 늘 불렀던 것일 텐데, 간수들이 시끄럽다고 제지하기도 했다고 들었다”고 회고했다. 아쉽게도 노래의 가락은 알 수가 없다. 문씨는 “어머니(1983년 작고)가 부르실 때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그때 녹음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깝다”고 했다. 기존 민간에서 불리던 곡에 가사를 바꿔 부른 것으로 기억된다고만 전했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은 “(노래 가사는) 아주 좋은 자료”라며 “가사만 남겨져서 아쉽지만 예전에는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을 때다”고 평가했다.

유관순 감옥 동료들이 함께 지어 부른 이 노래의 흔적은 지금까지 오직 심명철 지사의 장남 문씨의 증언으로만 존재했다. 앞서 문씨의 증언을 토대로 1991년 소량 발간된 문고판 ‘선죽교 피다리’(저자 장수복)에는 ‘진중이 일곱이~’로 시작되는 곡의 제목이 ‘선죽교 피다리’로, 두 번째 곡은 ‘대한이 살았다’라고 붙어 쓰여 있다. “명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저자가 임의로 제목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내가 어머니에게 들은 것을 저자에 건넨 것 같다.” 문씨는 ‘선죽교 피다리’라는 제목에 대해선 “선죽교(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충정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곳으로 전해진 개성시 소재 석교)가 충정을 의미하고, 8호 감방에 개성 출신이 많아 그렇게 붙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저자마저 사망해 노래 제목들이 8호 감방에서 붙여진 것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의 두번째 노래의 가사.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썼다. 이진희 기자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의 두번째 노래의 가사.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썼다. 이진희 기자

가사는 8호 감방 7명 가운데 누가 지었을까.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권애라 지사였으리란 추정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개성에서의 3ㆍ1운동을 주도했던 권애라(1897~1973) 지사의 손자 김정일(72)씨는“할머니가 명창처럼 노래를 잘하셨는데 개사를 해서 잘 부르셨다”며 “가사를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할머니께 그 가사 내용을 들어본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할머니가 지었다고 하셨던 것 같다”고도 말했다. 문수일씨도 “권 지사가 가장 활동력 있고 많이 배운 분 같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문씨는“유관순 열사는 가장 어렸기 때문에, 아마 어윤희ㆍ권애라 등 비교적 연장자들이 주도해서 만들었을 것 같다”고 추정했다.

권애라 지사는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이화학당 선배이기도 했다. 김정일씨는 “유관순 열사는 할머니보다 4, 5년 후배였다는데, 할머니가 (감옥에서) 많이 챙겨주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권 지사가 생전 “유관순이 너무 많이 당했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어느 날 고문 당하고 감옥으로 돌아오면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어서 여자로서 걷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올 정도였다”는 것. 김정일씨는 “당시에는 할머니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맞아서 그런 것은 아니고 성고문이었다는 취지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한 ‘(일제에서) 본보기로 유관순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퍼졌던 만세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일제가 유관순 열사에 대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는 해석이 학교 쪽에서 흘러나왔다는 얘기이다. 김씨는 “유관순 열사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독립운동을 유독 더 많이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집중적으로 고문을 당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유관순 열사는 징역 3년 형을 받아 당시 8호 감방 수감자 중 가장 형량이 높을 만큼 그의 3ㆍ1운동은 맹렬했다. 권애라 지사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보기보다 순한 성격”, 심명철 지사도 “유관순은 말이 별로 없었다”고 후손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가혹한 고문으로 유관순 열사의 기력이 쇠해진 상황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수감자들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문수일씨는 “어머니도 감옥에서 고문을 당해서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심명철 지사는 여섯 살에 약을 잘못 복용해 시력을 잃었고 역시 시각장애인이었던 아버지 문효덕씨(장작을 패다 파편에 찔려 실명)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아들이 아홉 살 때 사망했고 평생 사과장수, 삯바느질 등을 하면서 남매를 홀로 키워냈다. 문씨는 “정말 보통 분이 아니셨다”고 생전 어머니를 회고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신동준 기자

◇“살아남은 자가 배신자를 죽인다” … 결연했던 여성들의 3ㆍ1운동

8호 감방 수감자 7명 중 4명은 개성에서 왔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10권’에는 “여자 만에 의해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곳이 적지 않았다. 3월 3일 개성에서 있었던 만세시위는 권애라, 어윤희 등에 의하여 호수돈 여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돼 있다. ‘독립운동사 제9권’에는 “개성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충교예배당 내에 있는 유치원 교사 권애라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함으로써 발단한다”며 “33인 중의 한 사람이 개성 북부 예배당의 목사인 강조원 앞으로 비밀리에 선언서를 밀송했고, 강 목사는 이웃에 살고 있던 권애라에게 의논했으며 어윤희는 강 목사로부터 선언서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어윤희 지사는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인이었고 2,000매의 독립선언서 배포를 맡았다. 그는 동료 여성 전도사 신관빈에도 도움을 청했고, 신 지사도 개성 일대에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심명철 지사는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었다. 1919년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군중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체포됐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당시 개성에서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결기가 뜨거웠다. 학생회장이던 이경신, 그의 언니로서 미리흠학교 교사였던 이경지 자매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고, 서울에서 밀송되어 온 독립선언서가 어떻게 쓰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2월 말부터 호수돈 기숙사에서 총 17 명의 학생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호수돈 여학교, 미리흠여학교, 호수돈 소학교의 학생 약 70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이들은 “만일 배신자가 나오면 살아남은 자가 그 배신자를 죽인다”고 맹약했다(독립운동사 9권). 여학생들은 3월 1일 아침 식당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교장이던 미스 와그너(Wagner)가 뛰쳐나와 제지했으나 거리로 나가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이에 따라 군중이 합류했다.

8호 감방 수감자 중 세 명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왔다. 유관순 열사는 잘 알려진 대로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임명애(1886~1938) 지사는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100여 학생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강행하다 체포됐다(독립유공자공훈록). 임 지사는 구세군 사령 부인이었는데, 그가 먼저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3월 25일 임 지사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인쇄된 격문에는 “오는 28일 동리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하겠다”고 돼 있고, 이는 와동리, 당하리 등지에 배부됐다(독립운동사 2권). 격문은 남편 염규호가 썼다. 임 지사는 수감됐다가 출산이 임박해 보석으로 풀려난 뒤 출산 한 달 만에 신생아와 함께 감방으로 돌아왔다. 남편도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생 출신의 김향화(1897~미상) 지사는 경기 수원군 자혜병원, 경찰서 앞에서 동료 기생 3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들 중 몇몇은 3ㆍ1운동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권애라 지사의 손자 김정일씨는 “할머니는 목숨을 내놓고 덤벼야 독립운동이라고 하셨고, 정말 똑똑한 분으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을 하셨던 분”이라며 “취조하는 형사의 뺨을 때렸다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권 지사는 1920년 서울에서 애국사상고취를 위한 여러 강연을 했다가 종로경찰서에 구금됐다. 그는 명연설가였다고 한다. 1922년에는 러시아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족여성대표로 참석했다(김준엽ㆍ김창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그가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 한국 대표는 23개 단체에서 선발한 52명이었는데, 이중 김규식, 나용균, 김시현, 권애라, 김원경은 민족주의자로 분석된다.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이었고 훗날 부주석을 역임했던 김규식 선생은 “우리가 미국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으나(태평양회의) 이제 실망한 나머지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 보려고 하는 뜻에서 참석했다”고 했다. 권애라 지사의 남편은 의열단으로 활동하다 15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던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이다. 김시현 지사는 이승만 정권의 폭정에 분개해 이승만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으며 그로 인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정운현, ‘묻혀있는 한국 현대사’).

어윤희 지사도 출감한 뒤 독립운동가들에게 여비를 마련해 주고, 육혈포탄환 등을 감추어 전달하기도 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년에는 보육원 등을 운영하며 고아들을 위해 일했다.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는 “어머니도 출소 후 1920년 미리흠학교 동지들과 2차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했다가 발각돼 1년 선고를 받고 다시 6개월만에 가석방됐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부분은 서훈 받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심 지사는 개성경찰서의 한국인 형사 황달평에게 체포됐는데 형사가 “앞 못 보는 ‘장님’주제에 무얼 안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느냐?”고 하자 심 지사는 “눈이 멀었다고 마음조차 멀었겠느냐?”고 항변했다(장수복의 ‘선죽교피다리’)

[저작권 한국일보]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자택에서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와 가족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홍인기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가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자택에서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와 가족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홍인기 기자

◇8호 감방의 비밀…노순경 지사는 어디에 있었나

2013년 복원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여옥사에는 8개의 감방이 있다. 6개는 2, 3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감방, 2개는 6, 7명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다. 8호 감방은 두 개의 큰 방 중 하나. 8호 감방은 ‘유관순 열사의 방’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19일 찾은 8호 감방 입구에는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조화가 꽂혀 있었다.

노순경(1902~1979) 지사의 후손들은 노 지사 또한 8호 감방에 유관순 열사와 함께 수감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차녀이며,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1919년 12월 2일에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해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의 처참한 현실을 외부에 알리고 일제에 항의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노 지사와 인연이 있다. 노순경 지사의 외손자 김영준(65)씨는 “스코필드 박사와 관련한 기록들을 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체 면회를 불허한 상태였는데 스코필드 박사가 거듭 요구해 외할머니를 면회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간호사였던 노 지사를 면회하고자 했고, 당시에는 영ㆍ일 동맹 상황이어서 영국계 캐나다인이었던 스코필드 박사의 면회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김영준씨는 “스코필드 박사가 외할머니를 면회 갔다가 간수가 막는 것을 불사하고 억지로 감방 안에 들어갔고, 이때 외할머니에게서 어윤희 지사, 유관순 열사 등을 소개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준씨는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스코필드 박사와 유관순’이라는 제목의 설명문이 있는데, ‘스코필드 박사와 노순경’으로 바꾸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박경목 관장은 “7명은 회고록이나 다른 자료 등에서 함께 수감된 게 확인이 된다”며 “노순경 지사가 8호 감방에 있었다는 것은 스코필드 박사의 책에만 나와 있는데 스코필드 박사가 방문한 때가 1919년 5월인지, 1920년 5월인지 시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스코필드 박사의 저서도 직접 쓴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옮겨 적은 책이라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노 지사는 다른 7명과 달리 1919년 12월 쯤에 수감이 됐기 때문에 3~6월 쯤 수감된 이들과는 시기상 차이가 있다. 수감자 별로 형량도 차이가 있어서 출소했거나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거나 하는 식으로 8호 감방 구성이 달라졌을 수 있다. 실제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는 “감방에 7명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권애라 지사의 손자인 김정일씨는 “할머니에게서 8명이 함께 있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물론 어느 감방에 있었는지가 독립운동의 무게를 다르게 하지는 않는다. 김영준씨는 “유관순 열사가 감방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알려졌지만, 수감자들이 서로 눈짓을 해서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모두 하나였고, 서로의 고통을 위로하고자 노래를 지어 불렀다. 박경목 관장은 “3ㆍ1운동 때 수감된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확인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자료가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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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은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립의 주춧돌이 된 독립운동가들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독립운동사의 잊혀진 조각을 찾아내 올해로 100년을 맞은 1919년 삼월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함입니다. 풍성한 기획을 위해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김창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상임이사, 김형목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홍소연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 자료실장 등 많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의미 있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관 중인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지인, 학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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