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금돼지 해를 맞으며] 우리는 모두 돼지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금돼지 해를 맞으며] 우리는 모두 돼지다

입력
2018.12.29 04:40
수정
2018.12.29 12:33
2면
0 0

서로의 새끼들 건사하며 사는 것, 인간의 길이자 돼지의 길

‘豚’자 ‘돈’과 발음 같아… ‘황금돼지’ 아이들 경쟁 몰리기도

조선시대 민화 '산돈도'. 한국민화뮤지엄 제공
조선시대 민화 '산돈도'. 한국민화뮤지엄 제공

지방에 살다 보니 간혹 뜻하지 않게 멧돼지와 만날 때가 있다.

내 경우는 특히 글을 쓰는 작업실이 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고, 집에서 그곳을 가려면 한적한 국도와 작은 임도를 거쳐야 했기에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오늘처럼 마감이 겹치고 학교 업무도 쌓이면 주로 밤늦게 경차를 몰고 그 길을 가는데, 그러다 보면 무슨 예고 없이 날아든 세금 통지서처럼 고라니나 멧돼지와 맞부닥뜨리곤 한다. 세금 통지서야 세무서에 전화해서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요” 따질 수라도 있지만, 고라니나 멧돼지는 묻거나 따질 수도 없다.

그나마 고라니는 자기가 더 겁을 집어먹고 후다닥 헤드라이트 밖으로 내빼서 그저 놀란 가슴만 진정시키면 됐는데(실제로 나는 몇 번인가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밟아 로드킬의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국도를 시속 30㎞로 달리곤 했다), 멧돼지의 경우는 달랐다.

작년, 눈이 많이 내리던 1월의 어느 밤, 나는 임도를 지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만났는데, 그 녀석은 이전에 봤던 그 어떤 멧돼지보다 덩치가 컸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담력 또한 남달라 보였다. 녀석은 자기를 보자마자 멈춰 선 내 모닝 앞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도통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이젠 사람들뿐만 아니라 멧돼지도 내 경차를 무시하는구나,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클랙슨이라도 울리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놀라서 내 경차를 들이받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멧돼지는 크고 단단해 보였다. 철사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회색 빛 털이 그랬고, 사육된 양돈보다 한 뼘은 더 앞으로 툭 튀어나온 코와 입이 그랬다. 아이 씨, 그러거나 말거나 길 좀 비켜달라고, 네가 무슨 양아치냐? 왜 아무 죄 없는 사람 길을 막고 그러냐, 차 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금세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헤드라이트 불빛 안으로 작은 새끼 멧돼지 세 마리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끼 멧돼지들은 줄을 지어 길을 건너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 불빛 안에서 정신 없이 중구난방 움직여댔다.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 없는 멧돼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내가 우리 집 아이들과 키즈카페에 들어갔을 때 짓는 표정과 비슷했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솜사탕은 솜사탕이로다, 머릿속에 계속 그 문구를 떠올리는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운전석에서 허리를 조금 더 빼 멧돼지와 그 새끼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새끼들은 몇 초간 더 불빛 앞에서 짓고 까불다가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임도 옆 숲 쪽으로 들어갔다.

새끼들이 모두 숲 쪽으로 사라진 뒤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 없는 멧돼지도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임도엔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나는 한동안 모닝을 움직이지 않고 멧돼지가 사라진 숲 쪽을 바라보았다. 감정이입이 된 것은 역시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 없는 멧돼지 쪽이었는데, 나는 그 친구가 어쩐지 짠하고 안쓰러웠다. 눈이 내리는 숲은 아마도 겨울 내내 키즈카페일 테겠지. 거기에 혼자 남은 부모란... 나는 그 친구가 겨우내 새끼들과 무사하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기산풍속도'의 한 장면. 귀는 처져있고 다리는 가느다란 멧돼지를 잘 표현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기산풍속도'의 한 장면. 귀는 처져있고 다리는 가느다란 멧돼지를 잘 표현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그와는 반대로 감정이입이 전혀 안 되는 멧돼지와 만난 적도 있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교는 지방의 다른 대학교들과 마찬가지로 건물 뒤로 인적 없는 야산이 위치해 있는데(대한민국 지방대학교의 역사는 야산과 언덕과의 부단한 투쟁의 역사다), 그 때문에 가끔 멧돼지도 자기가 무슨 편입생이라도 되는 양 학교 안으로 들어올 때가 있었다. 한 번은 함께 스터디하는 친구들과 회식을 마치고(물론 술을 좀 마셨다) 기숙사까지 걸어가는데, 2학년 남학생 한 명이 야산 경계석 쪽을 바라보며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쭙쭙쭙, 메리야, 이리 와” 두 손을 내밀고 말했다. 남학생의 손에는 호프집에서 들고나온 작은 육포가 들려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저쪽으로 쑥 들어갔어요. 남학생의 말에 나도, 옆에 있던 학생들도 모두 경계석 앞에 일렬로 쪼그려 앉아 “쭙쭙쭙, 메리야, 이리 와” 단체로 애타게 강아지를 불렀는데... 어두운 숲에서 나온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멧돼지였다. 작은 멧돼지 새끼... 그리고 그 뒤에 또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 없는 멧돼지까지... 그날 나는 술기운에 그 누구보다 빨리 기숙사 건물 앞까지 도망쳤는데(그로 인해 한동안 비정한 스승이란 비난을 달게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동물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도망치면서도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니 당연 멧돼지에게 감정이입 하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았다.

돼지는 예전부터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피는 선지로, 내장은 내장대로, 심지어 고환과 머리까지 내주는 동물이 바로 돼지이다. 그뿐인가. ‘돈(豚)’자가 우리의 ‘돈’과 동음어라는 이유 하나로 꿈이나 상징마저 제 뜻과는 상관없이 소비되는 동물이 돼지이다. 그렇게 돼지를 소비하면서 돼지의 운명을 닮아 간 것이 지금 우리 인간의 삶이기도 하다. 우리 집 첫째는 2007년에 태어난 남자 아이인데, 그 해는 난데없이 ‘황금돼지해’로 명명되면서 그 이전 해나 그 다음 해보다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다른 해 세상에 나온 아이들에 비해 복을 받고 풍족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아이들은 여전히 어른들의 욕망에 휘둘리고 있고,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아이들을 ‘황금돼지’로만 보는 세계의 시선 때문이리라.

또다시 돼지 해가 다가왔다. 우리는 돼지에게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모습을 보는가, 아니면 ‘돈’ 그 자체를 보는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든 돼지는 오늘도 어느 인적 없는 야산에서 새끼들과 함께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상관없이 새끼들에게 젖을 내주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된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새끼들을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과 돼지의 길이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만나 감정이입도 할 수 있을 테지. 황금 말고 키즈카페로.

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기호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