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동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자리의 밥그릇이 자꾸 엎어져 있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메인 화면에 노출이 됐는지 낯선 사람들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글에 공감하는 댓글도 있지만 익숙한 비난의 댓글도 많았다.
동물을 동물답게 살게 두라고 한다. 자꾸 밥을 주니 고양이가 쥐도, 새도 잡지 않고 산다고. 인간이 자꾸 밥을 줘서 본능을 잃는다고. 그 돈으로 사람을 도우라고. 자주 듣는 충고라서 그러려니 하다가 ‘동물답게’라는 말에 멈췄다. 자주 듣는 말이다. 개는 개답게,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동물은 동물답게 살게 두지 왜 유난이냐고. ‘성질과 특성이 있다.’라는 의미의 ‘답다’라는 접미사가 미투 운동이 번지면서 최근 자주 소환됐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유치하고 왜곡되었는지 확인했다.
동물다움은 어떨까. 동물다움은 인간보다 하찮음을 전제한다. 그렇게 동물의 죽음도 고통도 비극도 가벼워진다. 동물다움을 이야기하려면 동물의 성질과 특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21세기 도시에 사는 고양이는 쥐나 새를 잡는 게 아니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성질과 특성을 지닌다. 이런 상황에서 밥을 주지 않으면 고양이는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고양이답게 살게 된다.
올 여름에 블로그 이웃이 구조한 검둥이는 쓰레기가 가득 찬 비닐하우스에서 살다가 구조되었는데 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오줌을 누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 꽉 끼어서 살다 보니 다리를 들거나 엉덩이를 낮춰서 오줌을 눌 수가 없어서 개답게 오줌 누는 법을 모른다. 얼마 전 친구가 구조한 개는 걷는 법을 모른다. 처음에는 다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골개가 대부분 짧은 줄에 매여 사는데 이 개는 짧아도 너무 짧은 줄에 매여 있어서 한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앉았다만 하고 살다 보니 걸어보지를 못했다. 다 큰 개가 구조된 후 한 걸음 한 걸음 떼고 있다.
개를 개답게 키우라고 하는데 개다운 게 뭘까. 그 말의 속내는 대체로 짧은 줄에 묶은 채 사람이 먹다 남은 밥을 먹이면서 눈비나 폭염을 피할 제대로 된 집도 없는 마당에서 키우라는 것이다. 앞의 개처럼 제대로 걷는 법도 모른 채, 오줌을 누는 법도 모른 채 사는 게 개다운 걸까. 개 번식장의 개들은 평생 땅도 못 밟아 보고, 무자격자가 하는 의료 처치와 제왕절개 수술을 받는다. 그건 개다운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에게 그들다움은 없다. 그런데 동물다움 타령이라니. 인간은 인간다움이 뭔지도 잊고 살면서. 물론 인간다움의 정의 또한 각자 다르지만 나에게 인간다움은 약자에게 손 내미는 삶이다.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는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해서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잡지기자 시절의 내가 곰에게 겨울잠을 허락하지 않는 내용에 분노하며 끼고 살았던 책이다. 사실은 잠보다 곰이 곰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했다. 책의 주인공인 곰은 본능대로 겨울잠도 자고, 자연 속에서 먹이를 구하면서 살고 싶은데 세상은 그렇게 살고 싶으면 증명하라고 한다. 스스로 곰이라는 것을. 팽팽 돌아가는 마감 일정 속에서 사회가, 조직이 규정한대로 살고 있던 나에게 너다움이 뭐냐고 묻는 책이었다. 스스로 곰임을 증명하려고 사람들 앞에 서서 애쓰는 주인공 곰의 펑퍼짐한 굴곡진 뒷모습조차 나랑 너무 닮아서 슬펐다.
인간도 동물도 태어난 대로 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같은 반달가슴곰이라도 누구는 지리산에서 겨울잠을 자고, 누구는 철장에 갇혀 쓸개즙을 내주면서 산다. 어떤 게 곰다운 걸까. 돼지해이다. 돼지는 코로 흙을 파며 노는 생명체일까, 그저 고기일까. 이미 획일적인 ‘~다움’은 없다. 환경과 관계에 의해 다르게 정의될 뿐. 동물은 인간이 정의한대로 존재한다. 길고양이가 고양이답게 살도록 밥을 주지 말라고 한다. 나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인간답게 살기로 했다.
김보경 책공장 더불어 대표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요르크 슈타이너, 요르크 뮐러,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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