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함께 여행’ 4년새 두 배로
아버지ㆍ아들ㆍ손자 3대 함께 다니고
80대 할머니ㆍ20대 손녀도 오붓하게
“추억 쌓고 속 깊은 얘기도 나눠”
“제한 두면 재미있는 경험 놓쳐
꾸준히 소통하면서 마음 읽어야”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회복제이다.”
19세기 미국 의대 교수였던 대니얼 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여행은 모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여행은 청춘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나서는 ‘액티브 시니어’들은 지난해 여행 소비를 주도한 세대로 부상했다.
이런 부상은 80대 조부모에게 ‘마음의 치료제’를 선물하는 이들이 늘어서다. 한국관광공사가 내놓은 ‘2017 아웃바운드 현황 및 트렌드 조사 보고서’를 보자. 최근 5년간 해외여행 동반자 수를 분석해 보니 본인 또는 배우자의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비율이 2014년 8.2%에서 지난해 12.3%로 증가했다. 여행사 하나투어의 경우 성인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나가는 여행의 수요가 2014년 16만명에서 2018년 30만명으로 늘어났다. 베이비붐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함께하는 ‘세대 간 여행’이다. 가깝다면 한없이 가깝지만 단둘이 있기엔 어색한 다세대 가족들, 이들은 왜 오붓한 여행길에 나섰을까.
◇이색 여행에 관한 욕구… 할머니와의 여행으로
80대 할머니와 20대 손녀의 사례가 눈에 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 대신 할머니가 손주를 대신 양육하는 경우가 늘고, 부모만큼 할머니와 교감하는 손녀들이 많아지면서다.
부산에 사는 직장인 박소희(25)씨는 최근 할머니 김차임(80)씨와 일본 오사카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두 사람만 갈 수 있겠느냐”는 부모의 걱정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더 아프기 전에 효도하고 싶어서” 여행을 추진했다. 박씨는 고혈압 약을 날짜 별로 챙기고 사전에 일정과 동선을 파워포인트(PPT)로 정리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오사카 호텔에 도착한 첫날, 할머니는 “언제 이렇게 커서 할머니를 데리고 이 먼 곳까지 왔냐”며 눈물을 보였다.
박씨는 “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가족에게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라며 “내년엔 할머니와 조금 더 멀리 떠나보려고 동남아 휴양지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인 김씨는 “건강 때문에 자신이 없었는데, 손녀의 설득으로 가게 됐다”며 “부모도 아닌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하다”고 했다.
대학생 박재희(24)씨는 어릴 때 함께 지냈던 할머니와 여행을 자주 다닌다. 하와이, 베트남 다낭에 이어 최근엔 일본 후쿠오카를 다녀왔다. 고생은 두 배로 하지만 박씨는 꾸준히 할머니와 여행을 다닐 계획이다. “속 깊은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할머니는 제 세대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고, 절 통해 할머니의 20대도 되돌아보셨어요. 만일 할머니가 그때 미혼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했다면 어땠을지 같이 상상해 보기도 하고요. 그런 추억을 건강하실 때 최대한 많이 쌓고 싶어요.”
경기 성남에 사는 직장인 송효정(27)씨도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난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길에 올랐다. 송씨는 “친구들과는 시간을 많이 보내는데, 할머니와는 대화도 잘 안하고 사는 것 같다”며 “여행을 다니다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 생각이 나더라”고 말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할머니의 반응을 확인했고, 할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예정된 일정을 바꿨다. 매순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지만, “친구와의 여행만큼 즐거웠다”고 했다.
지난 6월 할머니의 팔순 기념으로 태국 카오락 여행을 떠난 직장인 김미연(30)씨는 “내 세대부터 부모님의 맞벌이로 조부모 손에 키워진 손주들이 많은 것 같다”며 “소득이 생기니 부모만큼 조부모를 살뜰히 챙기게 된다”고 했다.
바쁜 부모님 대신 조부모를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경남 창원에 사는 대학원생 오다화(25)씨는 지난 7월 경기도에 있는 할머니와 제주도로 떠났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한 곳은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7080 테마공원. 오씨는 할머니와 옛날 교복을 맞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오씨는 “어머니가 평소 멀리 사는 할머니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한다”며 “어머니는 직장 일로 바쁘니 내가 대신 효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밝혔다.
여행사는 여행의 대중화로 경험이 쌓이고 남들과 다른 여행을 즐기려는 욕구가 늘면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여행의 대중화로 여행객들의 취향과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변형된 형태의 가족 여행이 등장한 듯하다”며 “이에 맞춘 세분화된 여행상품도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3대가 함께 떠나… 가족 여행의 확장
가족 여행 개념도 변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성환(37)씨는 지난달 3세 아들, 75세 아버지와 함께 홍콩 마카오로 떠났다. 3대에 걸친, 남자들만의 여행이었다. 김씨는 “아내는 직장 일로 휴가를 내지 못했지만, 이 기회를 통해 3대가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여행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린 아들은 홍콩 2층 버스를 타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홍콩과 마카오를 잇는 세계 최장 대교 ‘강주아오’를 건너고 싶어 했다. 세대별로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달라 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하지만 김씨는 3대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김씨는 “평소 부모를 함께 모시고 다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며 “아버지와 평소 못 나눈 얘기들을 나눴고 3대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인천에 사는 황현정(31)씨는 외할머니, 이모, 어머니, 사촌동생 등 여자 6명이 일본 오사카를 다녀왔다. 남자 사촌들이 시간을 못 맞춘 김에 여자들끼리 가는 여행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황씨는 “밤에 쇼핑센터나 선술집을 못 가는 게 아쉬웠지만, 언제 이렇게 가보겠나”라며 “손녀딸들이 모두 모였다는 게 할머니에겐 큰 자랑거리였다”고 했다.
◇“조부모와의 여행, 경험에 제한 두지 말 것”
밖으로 나가면 손주가 조부모의 보호자가 된다. 누군가를 책임져 본 경험이 없는 청춘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도전이 될 수 있다. 숙소와 동선, 음식까지 꼼꼼한 사전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가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여행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조부모와 여행한 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건강이었다. 해외에서 조부모가 갑자기 아플 경우 대처할 방법이 막막하다는 것이다. 조부모와의 여행이 처음이라면 비행시간 1~2시간 내외의 가까운 나라부터 도전해본다. 비행 경험이 많지 않은 노인들은 짧은 비행시간에도 불편함을 호소할 수 있다. 조부모의 평소 아픈 부분을 파악하고 상비약과 주의해야 할 점들을 미리 숙지해둔다.
박재희씨는 “날씨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7월 베트남에 갔을 때 한국 날씨와 별 차이를 못 느꼈는데, 할머니는 많이 힘들어 하시더라”며 “평소 여행할 때보다 날씨를 꼼꼼히 따지고 옷차림도 단단히 준비해 둔다”고 말했다.
많은 곳을 찾겠다는 욕심을 비우고 일정은 여유 있게 잡아둔다. 오다화씨는 “오후 7시쯤 숙소로 귀가해 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였다”며 “할머니의 평소 생활 패턴대로 일정을 짜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조부모가 지치면 하루는 숙소 주변 길을 산책하거나 온천을 즐기는 등 짜 놓은 일정을 변경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김미연씨는 “경험에 제한을 두지 말 것”을 조언했다. 배려는 하되, 조부모의 건강을 지나치게 우려해 새로운 경험을 놓치지는 말라는 것이다. 김씨는 “생각보다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노인들이 많은데, 너무 제한을 두다 보면 재미있는 일들을 놓칠 수 있다”며 “꾸준히 소통하면서 조부모의 마음을 읽고 이색적인 여행 코스를 짜보라”고 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김진주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