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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3ㆍ1운동의 두 차례 순사 처단… 제암리 학살로 이어지다

입력
2019.01.14 15:56
수정
2019.01.14 21:4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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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2> 불타오른 송산면의 삼월

간척사업으로 일본인 거주 많아 인력수탈 등 주민과 갈등 관계

격렬한 3ㆍ1운동 전개… “독립운동사 기록에 학살원인 잘못 기재”

일제는 순사 처단과 만세운동 보복에 나섰다. 일제의 방화로 인한 화성 일대 폐허 사진. 화성시 제공
일제는 순사 처단과 만세운동 보복에 나섰다. 일제의 방화로 인한 화성 일대 폐허 사진. 화성시 제공

1919년 4월 15일 오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일본 군인들은 “강연이 있다”고 속여 예배당 안으로 20세 이상 남성들을 강제로 모이게 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문 모른 채 예배당으로 들어온 남성들 앞에 강연 같은 건 없었다. 군경은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못까지 때려 박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들은 문을 부숴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사살했다. 남성 21명, 여성 2명이 죽었다. 여성 2명은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다 군인에게 그 자리에서 피살됐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2권). 예배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총 28명이 살해됐다는 기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있다. 일제의 대표적인 만행이었던 ‘제암리 학살’이다.

제암리 학살은 인근 송산면 사강리에서 있었던 최초의 일본 순사 처단(3월 28일), 그 영향을 받아 우정면 화수리에서 벌어진 두 번째 일본 순사 처단(4월 3일)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ㆍ1운동 때 일본 순사 한 명과 순사보(조선사람 3명)를 처단(3월 4일)했고, 남쪽에서는 사강리와 화수리에서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강리에서는 수원경찰서에서 감시 나온 순사부장(노구치 고조)이, 화수리에서는 현지 주재소 순사(가와바타 도요타로)가 죽었다.

일제의 방화로 인한 화성 일대 폐허 사진. 화성시 제공
일제의 방화로 인한 화성 일대 폐허 사진. 화성시 제공

박환 교수는 화성 일대(당시 수원군) 3ㆍ1운동이 격렬하고 파괴적이었던데 대해 “1910년대부터 일제가 서해안에 간척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 때문에 일본인 기술자 등이 많이 들어와 살았다”라며 “그러면서 인력수탈, 여성들에 대한 해코지 등이 이어져 갈등 관계가 형성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독립운동사 기록에는 제암리 학살 계기가 잘못 기재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립운동사 제2권은 “4월 5일 팔탄면 발안 장터에서 1,000명이 넘는 만세운동이 있었고, 일경이 무차별 발포하자 군중이 격노했으며 일본인 경찰부장은 시위행렬의 돌에 맞아 죽었다”고 돼 있다. 제암리는 발안 장터로부터 1.5㎞쯤 떨어진 곳으로 한 동네처럼 왕래했다고 한다. 즉 발안 장터에서 세 번째 일본 순사 처단이 있었다는 기술인데, 이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혜영 전 제암리 3ㆍ1운동순국기념관 선임연구원(화성시 독립기념사업팀 주무관)은 “일본 쪽 문서(공판기록, 헌병대 기록 등)에서는 4월 5일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라며 “발안 장터 시위에서 사망한 이정근 지사(1856~1919)의 사망 일이 4월 5일로 돼 있길래 후손(증손자)에게 확인해보니 3월 31일에 별세했는데 날짜를 잘못 올렸다고 하시더라”고 설명했다.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날짜가 혼재돼 잘못 기술된 것으로 보인다. 이혜영 주무관은 “보훈처 쪽에 알렸더니 후손이 직접 수정 요청을 해야 한다고 해서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 주무관은 제암리 학살 배경에 대해 “발안 장터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순사가 처단되고 만세 시위가 거세지면서 일본 여자들과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할 정도였다”며 “제암리 학살을 일으킨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의 판결문(무죄 선고)을 보면, 제암리ㆍ고주리 등지에서의 섬멸 없이는 독립운동 바람을 저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화성 일대에서는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가 올랐고 횃불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은 격렬한 저항으로 확산됐다. 이 주무관은 “제암리 학살 후 그 군대가 바로 5분 거리의 고주리로 이동해 독립운동가였던 김흥렬(미상~1919) 지사의 가족(6명)을 사흘 동안 불태워 죽였다”며 “제암리만 따로 떼지 않고 화성시에서는 ‘화성 제암리ㆍ고주리 학살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고 했다. 사강ㆍ화수리 등지도 순사 처단 이후 참혹한 일제의 보복과 방화를 겪었다. 넓게 보면 화성 일대 전체가 ‘학살’ 지역이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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