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이사장,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 인터뷰
지난해 7월 세상을 떠난 노회찬 전 의원의 정신을 잇기 위한 ‘노회찬재단’이 24일 출범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며 진보적 가치 확산을 위해 애쓴 ‘노회찬 정치’를 되살리기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뜻이 모아진 결실이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쓴 그의 유언을 실천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고인과 오랜 관계를 맺은 인연으로 재단 이사장을 맡은 조돈문(65) 가톨릭대 교수를 만났다.
◇연 2회 시민정치학교 열어 쌍방향 리더십 정치인 육성할 것
-재단 출범식과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출범식은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문화행사 위주로 진행된다. 1주기 때까지는 노회찬의 글과 영상을 모은 아카이브 구축을 하게 되는데, 이미 많이 진행됐다. 1년에 두 차례 시민정치학교를 열고 노회찬의 꿈을 공유하는 작업을 벌여 나갈 계획이다. 활동가뿐 아니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대중적 진보정치인의 모범인 노회찬의 뒤를 이을 젊은 정치인들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통적 교육방식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숙의민주주의 모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쌍방향 리더십을 지향할 생각이다.”
(노회찬재단 설립은 지난해 9월 49제 추모행사에 참석한 유시민, 방송인 김미화, 박찬욱 감독, 최장집 교수, 김명환 민주노총위원장, 백승헌 민변 회장 등 18명의 제안으로 추진됐다.)
-일반 시민들의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지난달까지 3,400명 정도가 후원회에 가입했다. 1주기까지 1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단이 출범하면 시민들의 성원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후원회 동참은 단순히 자선단체에 지원하는 성격과는 다르다. 노회찬의 꿈이 실현되도록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노회찬, 꼭 당선돼라 해도 들은 체 만 체
-노 전 의원과의 인연을 소개해달라.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에 앞서 그 전해 7월부터 강령 만드는 작업을 했다. 나를 포함해 진보학계의 활동가와 학자 40여명이 참여했는데 고인이 작업을 총괄했다. 2004년 총선 때는 노 전 의원이 사무총장과 선대본부장을 맡았고, 내가 교수지원단 집행위원장을 하면서 다시 연을 맺었다.”
(조 이사장은 민교협 상임의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등을 지낸 실천적 지식인이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를 만들기도 했으며, 올해로 12년째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이끌고 있다.)
-당시 옆에서 지켜본 노회찬은 어떤 인물이었나.
“창당 후 2004년 총선에서 의원에 당선될 때까지 제때 밥 먹는 걸 보지 못했다. 대부분 끼니는 김밥으로 때웠다. 언젠가는 양복도 항상 같은 것만 입고 다니길래 물었더니 자신에게 양복은 중고생 교복과 같은 거라고 하더라. 한번 입으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입는 거라고 했다. 그는 늘 바빴고 수면 부족과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밝은 표정에 유머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낯선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남에겐 한없이 관대했던 사람 아닌가.
“민주노동당 창당준비부터 2004년 총선에서 사무총장으로 국회의원을 배출할 때까지 당을 먹여 살리느라고 별 짓을 다했겠지만 단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동창과 친지 등 주변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겠는가. 2004년 총선 당내 경선에서 비례대표 순번 8번을 받았는데 자신의 선거운동에 전념하는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당의 외연을 키우느라 신경도 쓰지 못했다. 내가 ‘당신이 당의 강령과 공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꼭 당선돼야 한다’고 해도 들은 체 만 체했다. 당시 최대로 잡은 게 비례대표 6번 순번이었는데 다행히 8번까지 턱걸이할 수 있었다.”
-노회찬의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결국 극단적 선택과도 연결된 것 같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남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 사석에서 고민을 얘기하는 자리인데도 언제나 품격과 격조를 지켰다. 민주노동당 분열과 진보세력 통합 과정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했는데도 묵묵히 견뎌냈다. 사석에서 나눈 대화를 그대로 TV로 방영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노회찬도 인간인데 속은 얼마나 썩었겠나. 빚더미에 올라앉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한테도 매도 당하고 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사고가 날 때까지 그런 생각 못했는데 그가 갖고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어 주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럽다. (조 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목이 잠겨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스스로 정한 기준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이다.”
◇술자리서 남 비난하지 않고 빚더미에 올라도 웃음 안 잃어
-요즘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노회찬으로부터 배워야 할 덕목이 많지 않은가.
“관용과 상생, 그리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진보정치인이다. 하지만 요즘 진보 엘리트주의자들에게는 그런 미덕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진보니까 자기가 하는 건 모두 정당하지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다 틀렸고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치부한다.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평소엔 군림하다가도 선거 때는 시장 바닥에 나와 무릎 꿇고 하는데 진보 엘리트주의자들은 그것조차도 안 한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 가슴에 울림을 주고 지지를 끌어낼 수 있겠는가. 노회찬은 진보가 아닌 사람하고도 소통하고, 진보 메시지를 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위트와 유머로 스며들게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 전 의원 연설 가운데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가 뒤늦게 큰 화제가 됐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을 전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아진 게 거의 없다.
“새벽 4시 6411번 버스를 타고 강남의 고층빌딩에 출근하는 청소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을 전한 연설 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고인의 추모기간 동안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비정규직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들을 노회찬은 투명인간이라고 칭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 될 것으로 기대했다. 상시 지속적 업무와 생명안전 관련 업무는 직접 고용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관철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가지 약속했던 원칙을 모두 지키지 않고 있다. 서부발전 김용균씨 같은 죽음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노 전 의원이 생전에 “도입만 된다면 영혼을 팔겠다”고 한 게 연동형 비례대표제인데 지금 정치권의 논의 과정을 보면 비관적 전망이 커져가는 듯하다.
“문 대통령에게 실망스러운 점이 인간 문재인과 문재인 정부 간의 괴리다. 문재인 말은 100%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대통령이 된 후에는 여느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은 행보를 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써준 대본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대통령과 민주당이 공약으로 약속했고 당론으로 정했던 거다. 그런데 지지율이 높아지니 연동형으로 하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딴소리를 하고 있다. 저러다 내일이라도 지지율이 폭락하면 다시 연동형 도입하자고 나설 판이다. 이런 정치적 이해타산은 오히려 문 대통령의 강점을 소진시킬 뿐이다.”
-지난해 7월 현 정부의 사회ㆍ경제개혁 의지 후퇴를 우려하는 지식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는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혁신성장과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 등 세 가치 축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혁신성장은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내용과 거의 똑같다. 공정경제도 지금 수준은 이전의 상생과 중소기업 살리기보다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지난 정권과 가장 큰 차이가 소득주도성장인데 이는 혁신과 공정경제에서 성과를 내야 가능한 부분이다. 소득주도성장의 긍정적 효과는 한 사이클이 지나는 최소 2,3년은 걸려야 나타난다. 그런데 혁신과 공정경제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이를 소득주도성장의 실패로 규정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면 기다려봐야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와 노동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진보진영에서조차 민주노총 책임론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일단 정부는 민주노총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과정에서 노동계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처벌 유예나 탄력근로제 도입, 산입범위 조정 등 재계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했다. 그래 놓고 사회적 대화기구에 들어오라는 건 맞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노총이 전반적인 사회경제정책 후퇴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을 집행하도록 압박하고 감시하는 게 민주노총 역할인데 그 책무를 포기한 셈이다. 한국노총과 공조도 성사시키지 않고 국민여론은 견인하지 않은 채 밖에서 반대 집회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조만간 스웨덴 노동문제를 주제로 책을 낸다던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뭔가.
“스웨덴의 노조 조직률은 70% 이상이다. 자본가 단체의 내부 규율도 무척 강하다. 세계 최강의 자본과 노동이 공존하는 곳이다. 비결은 높은 상호 신뢰에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한 곳이 스웨덴이다. 노동자 대표이사제가 있어 기업이 존망의 위기라고 판단되면 노조도 정리해고를 수용한다. 대신 해고 당한 사람들을 위한 실업자보험 등 소득보존 제도가 잘 마련돼 있다. 결국 노사간 신뢰를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인터뷰=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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