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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면 되레 불이익” 줄줄 새는 R&D 예산

입력
2019.01.14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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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예산 20조 시대의 그늘] <상> 불필요한 곳에 혈세 펑펑

 연구비 남길 땐 ‘불성실 이행’… 성과급 같은 인센티브 줄어 

 안 가도 되는 해외학회 가고, 필요 없는 장비ㆍ물품 구매도 

[저작권 한국일보]연구개발(R&D)-예산-추이/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연구개발(R&D)-예산-추이/ 강준구 기자

#.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연구원 A씨는 작년 10월 200만원 넘는 컴퓨터 장비를 급하게 구입했다. 그가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지원으로 수행하던 연구프로젝트 규정상, 해당 과제가 종료되기 2개월 전까지 모든 장비 구입을 완료하도록 하고 있어서였다. 사실 A씨는 딱히 컴퓨터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부 연구 사업에서 돈을 남기면 연구수당 등 성과급이 줄어든다”며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해외 학회를 가거나 필요 없는 물품을 구매하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올해 우리나라의 R&D 예산은 처음으로 20조원을 넘어선다. 전체 예산(469조6,000억원)의 20분의 1에 가까울 만큼(약 4.4%)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정부는 R&D 예산 20조원 돌파에 한껏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정부 R&D 예산은 역대 최고로 많다. 혁신으로 기존 산업을 부흥시키고 성장 동력이 될 신산업을 육성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외형만 커진 R&D 예산의 내실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씨 뿌리기’ 작업에 비견될 만큼 역대 정권은 R&D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비용부담을 기꺼이 감수해 왔다. 실제 2011년부터 작년까지 R&D에 쏟아부은 정부 예산만 130조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은 “세금 투입에 걸맞은 성과가 나올 수 없는 구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남기면 성과급 깎여” 세금 ‘펑펑’ 

13일 정부와 관련 학계, 기관 등에 따르면, 정부 R&D 예산은 국공립연구소, 출연연, 대학, 기업 등의 연구 자금으로 지원된다. 여기엔 연구개발 인력의 인건비도 포함된다.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R&D 집행에 대한 관리는 촘촘하다. 그러나 “비합리적으로 촘촘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통상 연구비는 과제 수행 기간에 따라 연간 총액으로 지급하지만, 여러 항목마다 한도(캡)가 정해져 있다. 그 한도를 초과하면 안 되지만 남겨서도 안 된다. 과제 종료 2개월 이전에 장비구입 등을 마쳐야 해, 꼭 쓰지 않아도 될 자금까지 무조건 써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강조한 ‘연구자의 자율’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모 국책연구기관 B연구원은 “5년 예정 과제의 연구비가 50억원이면 연간 10억원씩 지원되는데 1억원을 남기면 정부는 ‘불성실 이행’으로 인식한다”며 “해마다 들어가는 자금이 달라질 수 있는데, 정부는 이를 ‘9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10억원으로 뻥튀기했다’고 생각하고 연구자의 성과급 같은 인센티브에까지 불이익을 준다”고 말했다.

결국 상황에 맞춰 국민 세금을 알뜰하게 써도 되레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구조라는 의미다. 지난해 출연연과 카이스트를 포함한 4대 과학기술원 소속 연구자 398명이 국가 R&D 사업비를 유용해 '가짜 학회'에 참석해오다 적발된 사건도 ‘남기면 안 된다’는 인식이 변질된 데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규제는 물론 그간 연구자들의 연구비 유용 등에 따른 불신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일부의 그릇된 행위로 대다수 연구자를 옥죄고 있다는 불만이 비등하다. 가령 공동구매나 해외 직접구매 등을 통해 필요 물품을 구입할 경우, 연구비를 크게 아낄 수 있지만 ‘리베이트’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조달청을 통해서만 구입하도록 하면서 세금을 아낄 기회마저 봉쇄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희준 연세대 교수는 “연구비 집행 실적과 성과급 연동, 이에 따른 불필요한 지출 강요, 연구장비 조달방식 획일화 등은 이미 현장에 만연한 문제”라며 “연구 예산도 다음해로 이월하거나 반납하는 방법이 막혀 있어 세금이 낭비되는 경우가 적잖다”고 지적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우리나라 연구개발 발전사 _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우리나라 연구개발 발전사 _ 송정근 기자

 

 ◇고무줄 간접비… 사립대ㆍ병원 수익으로 

연구기관에서 R&D 과제를 수주하면 해당 기관은 ‘간접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뗀다. 간접비는 연구에 필요한 인력 고용 행정 용품 구입 등에 사용하는 비용이다. 연구자들이 받을 수 있는 행정 서비스에 대한 비용이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이 간접비가 기관마다 천차만별이라는 데 있다. 출연연은 21~30%, 대학은 15~25% 등으로 제각각이다. 서울의 유명 사립 의대 C교수는 지난해 1억5,000만원 규모의 정부 R&D 지원 사업을 따냈다. 대학병원은 이 중 약 20%를 간접비 명목으로 가져갔다. 실제 C교수가 연구에 투입할 수 있는 금액은 1억2,000만원뿐이었던 셈이다.

C교수는 “연구자에게 복잡한 행정업무까지 신경 쓰지 말라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실제는 연구자가 행정업무도 주로 한다”며 “150억원 수주 때나 200억원 수주 때나 행정인력은 거의 변함이 없는데 병원은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라고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이 대학병원의 매년 정부 R&D 수주 규모는 200억원 안팎이다. 간접비를 20%만 떼도 매년 40억원의 병원 수익이 거저 생기는 셈이다.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는 사정이 정반대다. 지방 국립대 의대 교수 D씨는 “국립대는 인력을 국가 예산으로 충원하기 때문에 R&D 예산의 간접비가 5%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간접비가 뚜렷한 기준 없이 사실상 기관의 수익으로 인식되다 보니, 기관으로서는 R&D 예산을 많이 끌어오는 연구자가 최고일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해 서울 모 사립대의 교수 임용 과정이 학계에서 논란이 됐다. 대학이 교수 임용 조건으로 매년 국제학회 발표 논문 5편에 더해 정부나 기업의 연구과제 지원금 3억원 수주를 내건 것이다. 학계에선 3억원이 많고 적고를 떠나 이런 요구가 비일비재한 현실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방의 한 사립대 교수는 “사립대의 교외 연구비 수주는 승진ㆍ재계약과 관련되는데, 연구 능력과 관계 없이 시류에 맞춰 과제를 많이 따오는 교수들이 자연히 고위층으로 가는 구조가 됐다”고 토로했다. 학문ㆍ산업적 성과와 관계 없이 R&D 연구비는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공률 98%? ‘빛 좋은 개살구’ 

“매년 5만개가 넘는 정부 R&D 과제의 성공률이 무려 98%에 달한다. 정부 평가와 예산 배정에서 유리한 ‘단기 성과’ 과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작년 8월 문 대통령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한 말이다. 성공할 과제만 만들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는 꺼리는 풍토를 이미 정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현행 R&D 지원 체계가 그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출연연의 한 중견 연구자는 “출연연 연구자의 연봉 대부분은 PBS(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라는 정부 과제로 충당하고 있다”며 “과제를 따오지 못하면 월급을 온전히 받을 수 없어 성공할 수 있는 단기 과제를 앵벌이 식으로 3~4개씩 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토로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공무원의 관료주의도 난맥상의 원인으로 꼽힌다. 10년 전 100억원 규모 정부 R&D 연구과제를 5년 간 수행했다는 한 대기업 부장은 “열심히 했지만 신기술 개발이 쉽지 않아 ‘성실 실패’로 자체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정부에서 ‘차후 기업 자체 연구를 통해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바꿔 결국은 성공한 과제로 분류됐다”고 전했다.

과제 선정부터 관리에 공정성만 강조하다 보니 성과보단 과정에만 집착하는 본말 전도 현상도 잦다.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통상 과제 선정 2~3주 전 전문가 집단 가운데 심사위원을 추첨하는데, 공정성만 앞세우다 보니 바이오 분야 과제 선정에 태양광 전문가가 뽑히는 경우도 빈번하다”며 “집행도 결과보다는 규정을 잘 지켰는지, 비리가 없었는지에 치중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런 와중에 정작 기초연구나 장기과제는 등한시 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또 다른 출연연 중견 연구자는 “작년까지 200억원 지원되던 사업이 올해 30억원으로 확 줄었다”며 “대신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대폭 쏠리게 됐는데, 기존 연구와 연구원들이 한 순간에 필요 없어지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R&D 예산이 아무리 늘어도 혈세만 낭비되고 성과는 없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적잖다. 대전에서 만난 한 출연연 박사는 “멀리 내다보고 기초과학부터 응용과학까지 어떻게 발전시켜 가겠다는 장기 플랜은 전혀 없고, 설사 있더라도 정권마다 바뀌는 상황”이라며 “결국 R&D에 대한 정부 철학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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