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새해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시간은 강물과 같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전혀 낯선 공간으로 거침없이 진입한다. 제한적인 시간을 깨닫는 인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지금(只今)’에 매순간 들어선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인위적인 구분은 인위적인 허상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지금’, 그리고 그것이 연속되는 ‘영원한 지금’을 살 뿐이다. 순간의 지금이 영원한 지금으로 변화하는 열쇠가 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意志)’다. 두 발로 굳건히 서서 흔들림 없이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가기 위해 지금-여기에 있는 나를 심오하게 관찰하고 다듬고 작동시키는 용기가 바로 의지다.
나는 며칠 전부터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시간을 살기 시작하였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지난 50억여년간 한 번도 쥐지 않고 그 주위를 돌았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영원한 회기’라는 소용돌이 안에서 생존한다. 그 시간은 다시 한 번 1년이란 단위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인간은 자신이 순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영속시킬 체계를 만들어왔다. 유한한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자신이 남긴 업적을 통해 이름을 남기려한다. 인간의 이런 몸부림이 ‘문명’이다. 세월은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항상 저만큼 가버린다. 이 시간의 야속함이 아쉽다. 무심하게 쉬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멈출 방법은 없을까?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천체와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하루,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일 년이라는 인위적인 단위를 만들었다. 특히 일 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기본단위다. 2019년 새해를 알리는 뉴스 앵커의 카운트다운을 들었을 때, 내 마음 속에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주위사람들에게 보내던 ‘해피 뉴 이어’라고 보내는 문자도 부질없어 보였다. 새해란 무엇인가? 2019년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작’은 미래를 지금 이 순간으로 잡아당겨 장악하겠다는 의지가 스며있다. 시작은 끝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중간에 당연히 일어나는 다양한 방해물들과 장애물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누군가 목표를 정한다고,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에 도달 할 수 없다. 1월은 ‘시작(始作)’이란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시작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것이 된다. 시작은 어머니의 태(胎)와 같은 신비한 공간이자 시간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와 일정한 시간을 인내하면, 생명을 태어날 태아(胎兒)가 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창조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그는 우주의 현상을 구성하는 두 요소를 설명한다. 하나는 삼라만상의 모델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存在)’와 다른 하나는 그 존재를 흉내 내어, 실제 행태를 지닌 가시적인 모습을 지닌 ‘생성(生成)’이다. 생성이 일어나는 터전은 잘 보이지도 않고 불편하다. 플라톤은 이 터전을 고대 그리스어로 ‘코라(chora)’라고 불렀다. 코라는 어머니의 태처럼 모든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공간이자 시간이다. 코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와 버려진 땅 사이에 존재하는 버려진 공간, 즉 ‘경계’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지만, 도시와 질서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지노선이다.
시작은 변화무쌍한 생성의 과정이다. 고대 로마시대, 노예였다가 후에 철학자가 된 사람이 있다. 에픽테토스다. 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 가지로 간단히 구분하였다. 자신 이 조절할 수 있는 것들과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에 연연에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과도한 부, 명예, 혹은 기후와 같은 것들이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뿐이다. 내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고, 과거와 매듭지어야한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그것을 다가오는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하는 일은 신비하다.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공급받는다. 자신이라는 유일무이하면서도 자족하는 개체가 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유기한다. 누군가 날아오르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새가 뒤와 아래를 희생시켜야만 솟아오를 수 있다.
이 연초에, 나는 가만히 과거의 나를 응시하며 사소한 것까지 복기하여 반성(反省)한다. 그 반성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위한 기반이 될 것이다. 나는 공부방 조그만 방석위에 좌정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려나오는 나의 목소리를 경청하려한다. 내가 올해 완수해야할 임무는 무엇인가? 나의 개성이 드러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한 가지는 무엇인가? 시작은 변화와 개선에 대한 열망이다. 나는 무엇을 시작해야하나?
배철현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배철현의 정적’은 필자 사정으로 중단합니다. 이번 칼럼은 지난주 보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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