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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부라면요? 이 돈 써서 이런 연구 안 하죠” 연구원들 냉소

입력
2019.01.15 04:40
수정
2019.01.15 16:04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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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예산 20조 시대의 그늘] <하>관료주의에 발목 잡힌 R&D

 녹색산업→창조산업→4차산업 등 정권 바뀌면 연구주제도 바뀌어 

 임기 내 내세울 특허 숫자만 집착, 마지막 해에 대충 결과 정리 

연구개발(R&D) 예산 추이. 그래픽= 강준구 기자
연구개발(R&D) 예산 추이. 그래픽= 강준구 기자

“정부 예산을 받는 연구ㆍ개발(R&D) 과제 3개를 맡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정부라면요? 절대 제 돈 주고 이런 연구는 안 하죠.”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에서 20년 이상 태양전지 분야를 연구해온 A박사는 ‘R&D 예산 20조원이 잘 집행되고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R&D 과제 상당수가 내용(핵심기술)보다 유행 따라 포장지만 바꾸는 연구”라고 잘라 말한다. 공무원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처럼 정권 코드에 맞는 3~4년짜리 단기 과제를 만들면 그에 맞춘 ‘장롱 논문’ ‘장롱 특허’만 양산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A박사는 자신을 ‘앵벌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연구원 월급의 절반은 연구과제를 따서 충당하니, 과제가 뜨면 전공이 아니라도 일단 지원하고 본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올해 국가 R&D 예산이 사상 처음 20조원을 돌파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과학기술 현장엔 냉소가 가득하다. △5년마다 R&D 정책이 180도 바뀌고 △3~4년짜리 단기 과제를 사실상 강요하며 △연구보다 과제 수주에 급급하게 만드는 현재의 ‘관료주의 시스템’에선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게 현장의 절규다.

역대 정권의 핵심 키워드_신동준 기자/2019-01-14(한국일보)
역대 정권의 핵심 키워드_신동준 기자/2019-01-14(한국일보)

 ◇녹색→창조→4차산업… ‘유행가’ R&D 

14일 정부에 따르면, 비중이나 금액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R&D 예산은 화려한 외형과 달리 성과가 저조하다. 과학저널 네이처가 매년 발표하는 네이처 인덱스의 세계 100대 대학에 작년엔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만 겨우 이름을 올렸다.

이는 성과를 가로막는 낡은 시스템 때문이란 지적이 높다. 무엇보다 국내 R&D 정책은 10~20년을 내다보는 중장기 플랜 없이 정권에 따라 마치 ‘유행가’처럼 바뀐다. 참여정부에선 지능형 로봇 등에 대한 R&D가 크게 늘어난 반면, 이명박 정부 땐 신재생에너지 등 녹색산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6만개나 되는 정부 R&D 과제 선정에는 형식상 연구자 의견이 반영되긴 하지만, 실제론 정부가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탑다운’ 방식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 출연연의 B박사는 “과제 제안서를 쓸 때 별 연관성이 없어도 녹색(이명박 정부), 창조(박근혜 정부), AI(문재인 정부) 등 키워드를 엮으면 채택 가능성이 높았다. 5년마다 R&D 정책의 판 자체가 바뀌는데 꾸준한 연구가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출연연 C박사는 “가령 차세대 태양전지 ‘페로브스카이트’ 연구로 성과를 내려면 최소 10년은 필요한데, 3년 만에 과제가 끝난다. 이후 센서 분야가 뜨면 비(非)전공인 이쪽 과제를 따고 고작 석사급 수준의 논문을 쓰는 게 현실”이라고 증언했다. 작년 11월 ‘미래과학기술 오픈포럼’에서 이영 테르텐 대표는 “언제부터인가 스마트 팩토리에 대한 연구과제가 아니면 지원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R&D 지원 과정을 관리하는 관료 중심의 시스템이 연구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경우도 많다. 출연연 D박사는 “최소 6년 이상의 중장기 연구를 제안해도 결국엔 3~4년으로 쪼그라든다. 담당 공무원 입장에 중장기 과제는 자신의 임기 중에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관료들은 R&D 평가에서 겉으로 내세울 논문ㆍ특허 등의 숫자에 특히 집착한다. 이에 연구자들이 연구보다 국제학술지(SCI급)에 논문을 내는 것에 목숨을 거는 ‘SCI 논문 숭배주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과학기술 학술단체의 한 고위 관계자는 “SCI급 논문 수가 과학기술 경쟁력 평가의 절대지표로 활용되는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앵벌이’ 출연연 

전체 R&D 예산에서 가장 큰 몫(2017년 19조4,000억원 중 41%인 7조9,000억원)을 차지하는 출연연의 몰락도 ‘고비용-저성과’ R&D 구조를 고착화하는 요소다.

출연연의 역할은 국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나 기업ㆍ대학이 맡기 어려운 중장기 연구를 끌고 가는 것이다. 국내엔 원자력(원자력연구원) 정보통신(전자통신연구원) 등 분야별로 25개 출연연이 있다. 1990년대 한국을 IT 강국으로 이끈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도 전자통신연구원과 민간 기업과 협업해 개발했지만 그 이후 출연연이 주도한 대형 프로젝트는 전무하다.

출연연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ㆍProject Based System)가 지목된다. 정부는 1996년부터 연구원이 월급 일부는 정부에서 받고 나머지는 외부 과제를 따와 충당하는 PBS를 시행했다. 뛰어난 연구원이 더 많은 수입을 가지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연구원들이 전공이 아니더라도 인건비를 벌기 위해 과제를 따는 ‘묻지마 R&D’ 관행이 나타났다. 출연연 E박사는 “5년 과제를 하다가 마지막 연도가 되면 대충 결과를 정리하고 외부로 과제 따러 다닌다”며 “정말 필요한 과제인지, 전공과 부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출연연 F박사는 “1990년대 출연연과 제약사가 7년간 같이 신약 연구에 매진했고 2000년대 제약사가 발전하는 토양이 됐다”며 “하지만 PBS 구조에선 이런 장기적, 도전적 연구는 불가능하고 3년 안에 성과를 낼 쉬운 과제에만 집중한다”고 푸념했다.

 ◇“R&D 생산성 높일 때”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정부는 자율주행차, AI 등 미래 산업 분야에 5년간 R&D 집중 투자를 단행할 계획이나 R&D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이제는 수요자 기반의 R&D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연연이 예산의 약 33%를 기업 발주 연구과제로 충당하는 독일 모델을 제안한다. 실제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이 R&D 과제를 제안하고 평가하면 연구자의 자율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노환진(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전 교육과학기술부 연구지원과장은 “독일은 수요자(기업)와 별개로 연구자 그룹이 자체 연구과제를 제안하고 연구하는 공급자 중심 R&D도 탄탄하다”며 “우리나라도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 연구팀을 꾸려, 이들에게 믿고 돈을 주는 사람 중심 R&D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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