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연구비 집행기준 낮추고, 예산 유용엔 강력 대응 필요
국가예산으로 연구개발(R&D)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은 한 목소리로 과제 수행과 연구비 집행의 자율성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연구에 몰두하려면 지나친 행정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도 불필요한 절차와 기준은 완화해 나간다는 방침이지만, 한편에선 악의적인 예산 빼돌리기도 여전하다. 전문가들은 연구자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새 틀을 짜야 한다고 주문한다.
1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 8월까지 과기부가 지원하는 R&D사업 중 연구진이 연구비를 유용한 사례는 총 139건, 약 125억원에 달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연구원, 교수 등은 “연구 현장이 과거보다 투명해졌다”고 했지만, 연구비 유용 건수는 2014년 16건→2015년 18건→2016년 39건→2017년 34건→2018년 8월 32건으로 되레 증가하는 추세다.
연구비 유용 사례 중 절반(약 63억원)은 연구원, 학생 등 과제 참여 인력의 인건비를 유용하는 경우다. 정부는 연구책임자가 참여연구원 또는 학생 계좌로 지급된 개별 인건비를 회수해 공동 관리ㆍ사용하는 행위(일명 ‘풀링’)를 금지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쉽게 근절되지 않고 있다. 서은경 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도 전북대 교수 시절 약 6,000만원의 학생 인건비와 장학금을 연구실 공동 경비로 사용한 사실이 적발돼, 지난해 8월 취임 100여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영 여건이 취약한 중소기업에선 연구 물품을 가짜로 납품 받고 대금을 빼돌리거나, 물품 대금을 고의로 부풀려 증빙하는 경우도 여전하다. 과기부 지원 사업 중 정보통신(ICT) 분야 연구비 유용 금액의 78%는 중소기업이 횡령한 돈이었다. 과기부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연구비 유용이 적발돼도 끝내 횡령금액을 돌려주지 않거나 경영난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정부의 연구비 환수 비율도 50%를 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는 지나치게 깐깐한 연구비 집행 기준은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과기부가 지난해 12월 마련한 ‘정부 R&D 제도개선안’에 따르면 학생의 월별 과제 참여율을 일일이 따져야 했던 인건비 지급 기준은 총액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했다. 회의비, 출장비 등이 분산돼 있던 연구활동비와 연구과제추진비도 ‘연구활동비’로 통합해 간소화했다. 연구비 집행 시 보관ㆍ제출해야 했던 종이영수증도 전자영수증으로 대체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연구자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강화하기엔, 이런 미시적 제도 개선으론 부족하다는 지적도 높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해외에서는 장기간 대규모 예산 총액을 편성해 연구자 스스로 개별 과제와 예산을 결정하는 ‘블록 펀딩’이 일반화돼 있다. 자율성을 주는 대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연구자가 책임을 지는 역동적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도 “기초ㆍ응용 분야 R&D를 이원화해 자율ㆍ창의성이 요구되는 기초과학 분야에는 정부 성과 평가에서 자유로운 ‘그랜트(자유공모형)’ 방식 사업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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