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소프트웨어 개발연구실(SDL)’이란 낯선 이름의 회사가 미국 실리콘밸리에 등장했다. 초기 자본금 2,000달러(약 224만원), 반짝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조금 특이한 이름을 가진 회사’로 치부되기 딱 좋았던 규모. 1982년 주력상품 이름을 딴 그럴 듯한 이름을 간판에 새로 새길 때까지도 회사 직원은 8명이 전부였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집을 조금씩 불려간 회사가 거대한 공룡 회사로 성장한 것. 전 세계 13만7,000명의 직원과 175개국 43만 고객사를 둔, 지난해 매출액이 398억 달러(약 44조6,400억원)에 달하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회사. 바로 ‘실리콘밸리의 신화’ 오라클 얘기다.
신화의 시작은 바로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다. “품질이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잘 팔린다”는 지금은 뻔하지만 그 때는 획기적이었던 경영전략도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 실제 이 전략은 엘리슨이 SDL 창업 때부터 2014년 9월까지 37년간 오라클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으면서 회사를 이끌고 성장시키는데 있어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라클 이사회 회장 겸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컴퓨터에 눈 뜬 뒤 히피에서 IT맨으로
엘리슨의 성장 과정은 결코 ‘뻔하지 않았다’. 입양 가정에서 자란 그는 대학을 두 번이나 중퇴했다. “나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만큼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슨은 1944년 유대계 미혼모와 이탈리아계 미국 공군 조종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9개월 때 폐렴에 걸리자 생모는 양육을 포기했고, 그는 미국 시카고에서 사는 유대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미국에 도착하면서 상륙했던 뉴욕시 엘리스 섬에서 따온 엘리슨을 자신들의 새로운 성(姓)으로 삼아 살아가던 부부였다. 당연히 엘리슨도 양부모의 성을 물려받아 ‘엘리슨’이 됐다.
미국 일리노이대에 진학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2학년 때 양어머니가 숨지자, 정신적 충격에 기말고사를 포기한 뒤 학교를 아예 떠났다. 히피들의 천국이라 불렸던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며 거리를 배회하고 사람 사이를 방황했다.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다시 그만뒀다. 물론 일리노이대 때와는 이유가 달랐다. 그 때가 방황이었다면, 이 때는 도전이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시기. 엘리슨은 컴퓨터 기술에 미래가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고 했다. 산업의 본산인 실리콘밸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는 과감히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로 향했다. 그 곳에 ‘꿈과 미래’를 걸기로 한 것이다.
◇시장 점유 우선ㆍ적극적 M&A로 급성장
실리콘밸리의 여러 회사에서 일하던 엘리슨은 소프트웨어 회사 앰펙스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업무를 담당하면서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IBM연구소가 1970년 발표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 논문은 그가 오라클을 차리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는 정보를 열과 행의 값으로 저장하는 구조로,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른데다 기존 데이터를 수정하지 않고도 다른 정보를 추가할 수 있어 데이터베이스를 확실히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 이 기술은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나 정작 IBM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슨은 남들은 관심 없는, 그러나 미래가 무궁무진한 기술에 눈이 번쩍 뜨였다.
실제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소프트웨어인 ‘오라클 2.0’을 선보인 오라클은 관련 시장을 선점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여기에 엘리슨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제품을 시장에 출시한 뒤 빠르게 문제점을 개선해나가겠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먼저 시장 점유율을 높인 뒤 곧바로 후속조치를 통해 제품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것. 그가 처음 선보인 오라클 소프트웨어의 제품명이 오라클 2.0이었던 것도 첫 번째 버전(1.0)보다는 조금의 기술적 개선이 이뤄진 2.0에 고객들이 눈이 조금 더 갈 것이라는 전략적 결정이었다.
엔리슨은 인수합병(M&A)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본인에게, 오라클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 앞에서는 주저함이 없었다. 피플소프트, 시벨 시스템, 히페리온,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 굴지의 기업들이 속속 엘리슨의 선택에 따라 인수됐다. 2016년 93억 달러(약 104조 4,400억원)에 인수한 클라우드 기업인 넷스위트도 그 중 하나. 클라우드 분야 선두 업체인 아마존ㆍ세일즈포스ㆍ마이크로소프트 등에 비해 뒤처진다고 평가 받은 클라우드 분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엘리슨은 CEO 사임 이전인 2013년 7,840만달러(약 879억원)의 연봉을 받았다. 당시 전 세계 100대 기업 CEO 중 가장 많은 돈을 받는 이가 된 것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 주간지인 포브스는 세계 100대 부자 가운데 10위로 그를 꼽았다. 미국 하와이에서 여섯 번째로 큰 라나이 섬의 부동산 98%를 보유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에 1억1,000만 달러짜리 일본식 대저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돈만 많은, 성공한 기업가로만 치부할 순 없다. 엘리슨은 지금까지 전 재산의 1% 이상을 기부했다. 죽기 전 자산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내놓는 기부 서약에도 동의했다. 기부 서약은 2010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전 세계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운동이다.
‘투자’를 최우선하는 엘리슨의 지론은 오라클의 사회공헌활동에도 잘 묻어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단순한 의무나 보여주기 위한 환원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전 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컴퓨터공학 교육 프로그램인 오라클 아카데미. 2016년부터 2년간 이 프로그램에 지원된 금액은 총 70억 달러가 넘는다. 지금까지 오라클 아카데미를 거친 학생은 전 세계 120개국, 350만명이다.
2017년 엘리슨은 유럽연합(EU)과 오라클 아카데미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3년간 총 14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은 자바 언어 프로그래밍, 데이터베이스 설계 수업 등을 통해 학생들의 실무 능력을 높여 컴퓨터 공학 기술 발전과 취업을 돕는 게 목표다. 엘리슨은 또 ‘돌봄 보다는 치료(Cures, Not Cares)’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신약 개발을 포함한 생명과학의 발전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다.
◇독설과 여성편력 등으로 실리콘밸리 악동 평가도
엘리슨은 ‘고약한 독설을 내뱉는 사람’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래서 그에겐 ‘실리콘밸리 악동’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다. 애플을 만든 고(故) 스티브잡스 역시 유명한 독설가 중 한 명이지만, 엘리슨 역시 ‘활약상’은 그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다. 공교롭게 둘은 굉장히 친한 친구 사이다.
2013년 미국 CBS 방송에 출연한 엘리슨은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가 오라클의 소프트웨어 저작권을 불법 사용했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구글은 사악한 회사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기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2016년 열린 ‘오라클 오픈월드’ 행사에선 또 다른 경쟁사인 아마존을 향해 “아마존의 데이터베이스 서비스는 우리의 20년 전 수준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어 느릴 수밖에 없다”고 혹평했다. “승리는 중독적”이라거나 “이길수록 더욱 이기고 싶어진다”는 등 엘리슨은 여러 자리에서 본인의 억누르지 못하는 승부욕과 경쟁심을 공개하기도 했다. 여성편력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에 관련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2016년 미국 남가주대 졸업 연설에서 엘리슨은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라. 전문가들의 의견에 낙담하지 말고, 현재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늘 안주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그가 또 다시 어떤 문제작을 내놓을지. 엘리슨을 둘러싼 모든 평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그가 내놓을 ‘다음’이 궁금하고 기대될 수밖에 없다. 엘리슨은 그렇게 살아왔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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