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사회서 공감사회로] <5> 화해는 이해로부터
성미산마을 ‘아빠페미’ 결성… 마을운동회 때 ‘성차별 발언 논란’이 계기
“가정서 남녀간 존중 가르쳐야 할 시대, 내 딸은 성 평등 사회 살았으면”
“우리 마을에서만큼은 ‘성 평등’한 언어를 씁시다. 엄마 역할만 강조하는 ‘유모차’ 대신 ‘유아차’, ‘출산’ 대신에 ‘출생’으로 바꿔 부르는 건 어떨까요? 남편 가족만 높여 부르는 ‘아가씨, 도련님’ 호칭도 지양하고요.”
지난해 11월 7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학교 다목적실에 동네 주민 30여 명이 모여 ‘성 평등한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발제자로 나선 이는 이 동네에서 자녀를 키우는 김진환(40)씨. 그는 “성평등을 위해선 성 역할을 고정하고 여성 혐오를 내포하는 언어 습관부터 바꿔야 한다”라며 목록을 만들어 배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차별적인 말을 쓰지 말아달라 제안했다. ‘페미니즘 이그나이트(igniteㆍ점화)’라는 이름으로 열린 행사를 주최한 이들은 놀랍게도 동네의 평범한 아빠들. 같은 해 2월 첫 모임을 가진 ‘성미산 아빠페미(아빠+페미니즘)’였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마을공동체로 평가받는 성미산마을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젠더(genderㆍ성)갈등은 이곳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이에 젠더 권력 구조에서 기득의 위치에 있는 성인 남성, 한 가정의 가장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해 뭉쳤다. 기성세대보다 젠더 문제에 예민한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간극을 극복하고 서로 화해하기 위해서, 파편을 이어 붙여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기 위해, 10명의 아빠(이후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불필요하게 ‘불편’해진다며 몇몇 회원이 떠나 6명이 남았다)와 마을의 유일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교사, 그리고 학생 3명이 모여 ‘아빠페미’를 결성했다.
이해가 실천으로, 실천이 공존으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젠더’만큼이나 활활 타오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되는 화두가 있을까. 지난 연말 한국일보가 진행한 설문조사(1월 2일 자 1면 보도)에서 젠더 갈등은 ‘향후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이는 우리 사회 갈등’ 2위(19.1%)에 올랐다. 특히 20대 응답자의 절반 이상(50.5%)이 이렇게 답해 젊은 세대일수록 젠더 갈등을 무겁게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각성에 비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성 대결의 주 무대인 온라인 공간에서는, 건전한 토론은커녕 극단적인 혐오 발언과 조롱만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아빠들이 페미니즘을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대로면 아이들이 살아야 할 미래 공동체가 위태롭다는 판단에서다. 공존하기 위해선, 이해해야 했고, 이해하기 위해선 알아야 했다. 성미산학교에서 페미니즘과 인권 교육을 받아 젠더 감수성이 높은 아이들의 질문은 점점 풍성해지는데, 가부장제 한국 사회에서 자라온 아빠들이 할 수 있는 대답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적 사건은 2017년 가을, 1년에 한번 열리는 마을운동회에서 일어났다. 게임 진행을 맡은 이종훈(52)씨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성안에 공주님이 갇혀 있으니 아빠들은 빨리 구하세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을 고정한 발언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마을 커뮤니티에 사과문을 올리면서 일단락됐지만, 마음 한구석엔 ‘페미니즘이 대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의 첫 단계, 무지(無知)와 무심(無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모르니 알아야 했다. 첫 석 달 동안 아빠들은 매주 세미나를 가지면서 ‘강남역 살인사건’ ‘낙태죄 폐지’ 등 우리 사회의 첨예한 페미니즘 이슈를 직접 조사하고 토론했다. 지난 여름엔 여성학자를 초청해 △여성 혐오 마주보기 △남성성 바로 알기 △성에 대한 자기편견 깨기 △10대의 성(性) 등에 대한 내용으로 대중 강연을 4회 개최했다. 열혈 아빠페미 홍순성(54)씨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다 보니 지금까지 많은 젠더 이슈를 ‘제3자적 입장’에서 관전하듯 바라봤던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한 아빠는 직접 ‘혜화역 시위’ 현장에서 여성들의 분노를 지켜봤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성 수만 명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거리로 나와 울분을 터뜨리는지 의아했어요. 그런데 공부하면서 깨달았죠. 남성들은 평생 약자의 처지에 놓일 일이 별로 없으니, 여성이 갖는 근본적 불안과 분노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 자체가 ‘기울어진 젠더 권력’이라는 걸요.”
이해는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 만들기’로 이어졌다. 아빠들은 요리 교실을 열고 김장도 했다. 만든 밑반찬은 독거노인 등 이웃에게 전달했다. 마을 축제에 앞서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일을 함께하기 △차별과 비하 발언 하지 않기 △외모 평가하지 않기 등 ‘성 평등한 마을 축제’를 만들기 위한 10가지 약속 목록을 만들었고, 서울시 마을 공동체 종합지원센터가 이를 참조해 ‘성 평등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약속’을 펴냈다. 아빠페미 이전에는 ‘이게 왜 문제인지’도 모르던 아빠들이었다.
“자녀에게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과거에는 도덕이나 서예 등을 가르쳤다면, 이젠 가정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집안일을 함께하고, 이성 간 존중하는 가치관을 심어줘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아빠페미의 활동도 아빠의 변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가정과 아이, 사회의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실천으로 확대하려 하고요.”
아빠페미라는 새로운 아버지상의 출현을 통해 극단의 골이 깊은 파편사회에서도 노력으로 타자를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활동가는 “이해가 없이 타자를 바라보면 판단과 평가가 개입해 갈등으로 번지는 경향이 있다”라며 “자신의 딸이 성 평등한 사회에서 살았으면 하는 소망, 자녀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마음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듯 오늘날 젠더 갈등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에 공존의 실마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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