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기금조성 검토’ 보도에 靑 “논의도 반대도 없었다” 일축
日 방위상 자위대 기지 방문 vs 鄭국방 해작사 방문 ‘맞불’
지난해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촉발된 한일 간 외교 분쟁이 상호 협의에도 봉합되기는커녕 장기화할 조짐이다. 우리 해군 함정이 일본 해상 초계기에 공격용 레이더를 겨냥했느니 거꾸로 일본 초계기가 위협 비행을 했느니 하는 군사당국 간 옥신각신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외교ㆍ군사 갈등의 악순환으로 전선(戰線)이 확대 고착화하는 형국이다.
26일 청와대는 한국 정부와 한일 양국 기업이 참여하는 징용 피해자 지원 기금 조성 방안이 한일 외교당국 사이에서 검토됐지만 청와대 반대로 논의가 중단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 내용을 “논의도 반대도 없었다”고 일축했다. 김의겸 대변인은 기자단에게 보낸 공지 메시지에서 “이 기사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한일 외교당국 간에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관련 소통이 계속되고 있으나 기금 설치 관련 의견 교환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정부와 양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이란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인데, 이런 움직임이 청와대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됐다니 이는 허구 위에 허구를 쌓은 격”이라며 예민하고 격하게 반응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며 “이런 원칙 아래 정부부처 태스크포스(TF)를 중심으로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실질적으로 치유하면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해 제반 요인을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비슷한 시점에 유사한 내용의 메시지를 외교부 역시 기자단에 보냈다.
상식과 어긋난다며 청와대가 펄쩍 뛰는 기금안은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징용 피해 배상 해법이다. 비공식 의제 정도는 됐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게 외교가 중론이다. 돈만으로 해결될 배상이 아닌 만큼 국내 여론이 나빠질 수 있는 데다 자칫 기업에 책임을 미룬다는 인상을 줄지 모른다는 부담이 한국 정권에 없지 않지만, 지금껏 가장 큰 걸림돌은 1965년 청구권협정 때 끝난 일로 자국 기업에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거부 의사였다.
더욱이 일본 기업 대상 재산 압류 등 승소한 징용 피해자들의 강제 조치 시도나 추가 소송이 예고된 상황에서 충돌을 막기 위한 타협안 도출이 더 다급한 쪽은 우리 정부일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협정에 근거한 징용 관련 외교적 협의를 이달 9일 공식 요청하면서 답변 시한을 ‘30일 내’로 못박아 우리 정부를 압박 중인 가운데, 25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을 상대로 소송 설명회를 여는 등 추가 소송 가능성이 가시화하고 있는 상태다. 정부로서는 내용은 나중 문제고 대책 자체를 신속히 마련해야 하는 형편인 셈이다. 이미 지난달 일본 언론을 통해 신각수 전 주일대사가 제안한 게 정부가 가능성을 부인한 ‘1(한국 정부)+1(한국 기업)+1(일본 기업)’ 기금안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차차선(次次善)’쯤은 되는 방안의 논의 가능성을 아예 봉쇄해버린 것은 최근 일본 초계기 비행을 두고 한일 간에 가열되고 있는 군사 공방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 싸움 차원이라는 것이다. 우리 측의 거듭된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방위상이 25일 초계기가 배치된 가나가와(神奈川)현 해상자위대 아쓰기(厚木)기지를 찾아 대원들을 독려하자,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주말인 이튿날 곧장 부산 해군작전사령부를 전격 방문해 일본 초계기의 위협 비행에 대응 수칙대로 적법ㆍ강력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하며 맞불을 놓은 일은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을 강하게 시사한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 해석이다.
청와대와 군의 대응은 다분히 정서적이다. 이와야 방위상이 해상자위대 조종사 복장으로 추정되는 가죽 점퍼를 입고 자위대 기지를 방문하자 정 장관도 해군 초계기 조종사들이 입는 점퍼를 똑같이 입고 사령부에 가는 식이다. 당초 비공개 방침이던 정 장관의 해작사 방문이 공개된 것도 이와야 방위상의 기지 방문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한일관계 악화는 동북아시아 안보 환경 변화 등 구조적 요인에 따른 것이어서 당장 해법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2017년까지만 해도 일촉즉발 긴장 상태였던 한반도 정세가 지난해 대화 국면으로 돌연 바뀌면서 한미일 3각 안보 네트워크가 급격히 이완한 터에 ‘미국 우선’을 외치며 동맹을 경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김재신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고문은 27일 “관계가 나빠져도 할 수 없다는 체념적 기류가 숙명적 파트너인 한일 양국에 공통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며 “공식 채널 외에도 비공식 소통 채널을 전방위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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