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살기 힘들고, 그 탓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은데 잘못 돌려 우리 사회의 혐오가 증폭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화를 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죠.” (제리케이)
“혐오는 ‘증오’가 아니라 항상 존재했던 구조적 차별을 의미해요. 최근 혐오를 받던 대상들이 반발해 ‘혐오하는 대상’을 혐오하기 시작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이죠. 이젠 이들이 연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슬릭)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래퍼 제리케이(35ㆍ본명 김진일)와 슬릭(28ㆍ본명 김령화)은 각각 ‘혐오 말고 직시’와 ‘혐오 말고 연대’가 적힌 깃발을 골라 들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이수역 폭행 사건’을 계기로 래퍼 산이가 여성 혐오라는 비판을 받는 곡 ‘페미니스트(feminist)’를 유튜브에 발표하자, 곧바로 이에 대항하는 디스곡(힙합 문화의 하나로 상대를 공개 비난하는 노래)인 ‘노 유 아 낫(NO YOU ARE NOT)’과 ‘이퀄리스트(EQUALIST)’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제리케이는 젠더(genderㆍ성)에 있어 약자 입장에 있는 여성이 발언권을 가장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젠더 이슈 관련 인터뷰는 슬릭과 함께 응했다.
◇아무 말 하는 게 힙합? 혐오 표현은 자유 아냐
‘할 말은 한다’가 힙합 정신이라지만, 약자와 소수자 혐오에 물든 한국 힙합은 표현의 자유를 한참 벗어났다는 게 중론이다. 슬릭은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곡이 나오자마자 몰매를 맞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하고, 곡을 쓴 사람이 음악을 그만 둘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그 노래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거 아니야. 네가 틀렸다’라고 누군가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리케이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대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권력”이라고 덧붙였다.
가부장제에서 보편적 교육을 받고 자란 남성 제리케이에게도 ‘직시’의 시점이 있었다. 2016년 슬릭이 제리케이에게 알려준 ‘맨박스(남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를 다룬 TED 동영상이 계기가 됐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오히려 성차별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고, 거기에서 벗어남으로써 모두가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 제리케이는 ‘내 안의 갈등’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 역시 2012년 발표한 곡 ‘유 아 낫 어 레이디(You’re Not A Lady)’의 여성혐오적 요소로 비판을 받았었다.
“저도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주입 받았던 외부 프레임 그대로 가사를 써내려 갔던 적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꼭 과거 가사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사람도 많죠. 하지만 저는 내가 과거에 했던 어떤 잘못들을 직시하고, 반성하는 것이 더 세련됐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겐 ‘소신발언’이지만, 이들에겐 업(業)이자 소명이다. 힙합에서의 랩은 평소에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표현해내는 수단이기에, 평소에 생각하고 느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제리케이는 “오히려 소위 ‘소신발언’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지 않으면, 나는 할 얘기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고 역설했다. 슬릭은 싱긋 웃으며 “사실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 없다”고 농담을 던지면서도, “내가 만든 노래를 지지하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나의 대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대중을 반하는) 소신발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 답을 내놓았다.
◇”왜 이렇게 예민해” 하다간 공존 못 해
‘(두 래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젠더 갈등으로 팔자에도 없는 실시간 검색어’까지 오른 두 사람은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 수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제리케이는 “지난해 혜화역 시위, 미투 운동, 몰카(불법촬영), 웹하드 카르텔 등 다양한 젠더 이슈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며 “잠복된 형태로 약자들에게 전가되어 온 갈등의 피해가 이제서야 수면 위로 드러났고, 당사자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가 조금이라도 열린 상황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슬릭의 반응은 덤덤했다. 슬릭은 “당사자들이 백날 ‘여성혐오가 존재해요. 심각해요.’라고 말하다가 “입장 바꿔 생각해 봐”를 극단적 형태인 ‘미러링(타인의 행동을 거울에 비춰 똑같이 따라하는 행위)’으로 말했더니, 이제서야 알기 시작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심각하다’는 남성, ‘이제 시작’이라는 여성. 제리케이는 이 인식 차이가 우리 사회 젠더 권력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고 해석했다.
“저는 ‘극단적’이라 진단했지만, 슬릭은 이제 시작이라고 하잖아요. 이 현상에 대한 인식 차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골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은 앞으로 더 구체적이고 깊은 논의로 나아갈 테죠. 그런데 이를 두고 “왜 이렇게 예민해”, “왜 이렇게 시끄러워”라고만 하면 문화적이든, 물리적이든,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차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존으로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김수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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