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 한국 경제 늪이 되다] <1> 터질 것이 터졌다
중장년 위한 좋은 일자리 태부족… 부실한 사회안전망이 창업 ‘재촉’
2006년 마흔 살에 공장 설비업체를 나와서 13년간 2번의 창업과 2번의 폐업을 경험했다. 어차피 ‘평생직장’이 사라졌다면 매를 맞아도 일찍 맞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PC방을 폐업하면서는 본전에 약간의 여유자금까지 건졌지만 두 번째 폐업은 달랐다. 요식업 노하우 공유를 기대하고 프랜차이즈 피자가게를 열었지만 가맹본부의 갑질에 시달린 끝에 문을 닫았다. 나날이 늘어나는 경쟁자들도 상황을 한층 힘들게 했다. 투자액 절반 이상을 잃고 재취업을 고민했지만 몰라보게 변한 현장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2019년 현재 그는 다른 피자가게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세 번째 창업을 고민하는 중년 남성, 권성훈(57)씨의 이야기다.
창업자 70%가 5년 안에 사업을 접는 상황에서 자영업자는 왜 줄어들지 않을까. 자연적인 구조조정은 왜 불가능할까.
권씨의 인생역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에선‘정년퇴직’이 드물어졌다. 퇴직은 빨라졌는데 눈높이에 맞는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이르면 40대부터 창업전선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한번 자영업자 대열에 뛰어들면 탈출도 어렵다. 2010년 이후로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가 퇴직대열에 합류하면서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24%)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6%)을 훌쩍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퇴직자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면서“구조적 문제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실한 사회안전망, 연공서열 문화…자영업 러시 재촉
지난해 1월 시중은행을 퇴사한 박모(44)씨 역시 창업을 준비 중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이를 돌보기 위해 퇴사해 재취업 일자리 선택폭이 좁은 편이긴 했지만 그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무직의 경우, 대부분 시간제이고 업무도 단순했다는 이야기다. 월급은 170만원 정도로 전 직장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박씨는 서점 겸 카페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박씨는 “창업이 적성과 맞을지에 대한 걱정도 컸지만, 그 정도 처우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느니 예전부터 꿈꾸던 서점을 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퇴직을 앞둔 중장년 임금 근로자들을 유인할 ‘좋은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자영업으로 떠밀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연령별 희망직종 설문조사(2016년)에 따르면, 청소·경비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0대 이하(1%)에선 매우 낮다가 50대(18%)부터 급상승해 60세 이상에서는 36%에 이른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스스로 기대수준을 낮추는 것으로 풀이된다.
부실한 사회안전망도 중장년층의 자영업 러시를 재촉한다. 실직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은 최대 240일이다. 그나마 자발적으로 퇴사한 경우엔 이마저도 받지 못한다. 급여수준도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동향 2018’에 따르면 한국의 실업 1년간 근로소득 대비 실업급여 수준은 31%로 OECD 평균(53%)보다 20%포인트 이상 낮다. 조사기간을 실업 이후 5년 평균으로 늘려 잡으면 한국의 실업급여 소득대체율(10%)은 OECD 평균(28%)의 3분의 1 수준이다. 안종순 고려대 연구교수는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짧으니 조급한 마음에 창업을 서두르고, 비교적 준비과정이 짧은 요식업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외식업 등 서비스업종의 경우 50, 60대 비율은 57%에 달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55~79세 고령층이 가장 오래 근무했던 일자리를 그만둔 평균 연령은 49세였다. 최소한의 노후 대비수단인 국민연금 수령까지도 15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생계가 급하니 별다른 준비 없이 창업하는 경우가 많고, 창업을 해도 장기간 이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김도균 경기연구원 연구원은 “여성은 요양보호사 등 사회서비스, 남성은 경비직 이상의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다”면서 “퇴직자 교육이 한동안 취업기술보다는 바리스타·목공 등 창업 위주로 운영됐던 점도 문제를 키웠다”고 진단했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식 기업 문화도 재취업을 어렵게 만든다. 권성훈씨는 설비업계로 돌아가 3,4개월 정도 일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기술이 크게 달라진 점이 난관이었지만, 연공(年功) 서열식 기업문화를 극복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갓 입사한 청년들에게 신입사원처럼 전선 배열을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면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배부르다고 할지 몰라도 매일 그런 감정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김보영 영남대 새마을국제개발학과 교수는 “중장년은 경력을 고스란히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조직에 들어가는 시도 자체를 꺼린다”고 설명했다.
◇특단의 대책 없으면 자영업 창업러시는 이어질 것
문제는 앞으로도 이 같은 자영업 러시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좋은 일자리 부족 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의 역량이 떨어져 기업으로서는 이들을 붙잡아 둘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기연구원의 보고서 ‘50⋅60세대 실직과 은퇴에 대비하는 일자리 안전망’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의 핵심직무역량은 청년기에는 OECD 최고 수준이지만 중장년기에는 최하위권이었다. 이 보고서는 “40대 이후 언어능력, 수리력, 컴퓨터 기반 문제해결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55~65세는 OECD 국가 중 컴퓨터를 이용한 문제 해결력이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와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고용불안정 위험에 사회적 불평등 및 빈곤문제가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기에 베이비붐 세대 은퇴의 본격화도 자영업 구조조정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이 세대는 730만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14%에 이른다. 김도균 연구원은 “앞으로 1964~1975년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까지 자영업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며 자영업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예상했다. 정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자영업 구조조정 문제를 고민해봤는데 뾰족한 답이 없다. 자영업이 그냥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고민을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자영업 구조조정을 하기 어려운 만큼 신규창업 억제, 고령자 일자리 다변화, 현직자 실무교육 강화 등 다양한 대책을 주문했다. 김도균 연구원은 “여성의 일자리로 인식되고 있는 요양보호사의 경우, 남성 노동력이 꼭 필요한 분야”라며 “이 분야의 처우를 개선해 남성퇴직자들을 흡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보영 교수는 “소방·치안 등 안전관리 분야도 퇴직자들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책역량을 다 쏟아붓지 않으면 자영업의 구조조정은커녕 되레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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