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작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한국일보에 전해 왔습니다.
작년 설 즈음이었으니 어느덧 일 년이 흘렀습니다. 불쑥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께서 잘 견디고 계시는구나, 힘드시겠지, 얼마나 힘드실까. 할머니를 다시 뵐 수 있을까. 저는 ‘기도’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었고, ‘우리는 깊은 존재들이다’라는 문장에 푸른 밑줄을 그었습니다.
일 년 전 저는 할머니의 방 문 앞에 떨며 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6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항암 치료 중이셨습니다. 반쯤 열린 문 너머, 홀로 섬처럼 누워 계시던 할머니의 몸이 무척 작아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 저렇게나 작으셨구나. 마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불필요한 살을 버리고 최대한 몸을 응축시킨 채로 버티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항암 약에 눌려 눈조차 좀처럼 뜨지 못하시는 할머니께 저는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할머니 가까이 다가가보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틀림없는 한 개인이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의 소설 ‘구토’ 앞에 실린 글입니다. 그 글이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할머니 또한 ‘틀림없는 한 개인’이라는 걸 할머니께 말씀 드리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할머니가 가장 보고 싶어 하시는 사람은 누군지, 좋아하시는 색깔은 뭔지, 신의 존재를 믿으시는지, 사랑은 해보셨는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그리고 틀림없는 한 개인인 김복동. 저는 그 두 김복동을 다 알고 싶었습니다.
“할머니, 가장 좋아하시는 꽃이 뭐예요?” 소개팅 자리에서나 오갈 법한 유치한 질문들로 할머니를 괴롭히면서 죄송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저는 할머니의 내밀한, 그리고 사랑스런 몇 가지 비밀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드는 것 때문에 생화는 싫으시다던 할머니. 하지만 천리향 화분을 앞에 두고는 방이 따뜻해 향기가 솔솔 올라온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셨지요. 천리향은 그 향이 천 리를 가서 천리향, 만리향은 만 리를 가서 만리향… 그리고 만인… 오래 전 할머니는 통영사 백련암 뒷마당에 석등을 세우셨지요. 사월 초파일마다, 좋은 날마다 그곳에 불이 들어와 만인(萬人)의 마음을 비추라는 소망을 담아서요.
겨울, 봄, 여름 세 계절 동안 저는 할머니를 찾아 뵈었습니다. “말이 무섭다”는, “말로 짓는 죄도 있다”는 할머니께 말을 시키려고요. 할머니의 닫힌 방 같은 입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마다, 대여섯 살 여자아이로 되돌아간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거울을 찾아 헤매는 기분이었습니다. ‘복 받은 아이’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태어나 한 번도 거울을 본 적 없는 여자 아이에게 거울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제 손보다 작던 여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거울을 찾아… 할머니를 뵐 때마다 제 손은 할머니의 손을 만지고 싶어 했지요. 분홍빛이 도는 이불을 쓸던 그 손을요. TV 화면으로 할머니의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과 선비처럼 꼿꼿한 모습만을 접한 사람들은 할머니의 손이 얼마나 가냘픈지, 얼마나 섬세한지 모를 것입니다. 할머니의 손에 제 손을 포개어보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다른 손이 당신의 몸에 닿는 걸 극도로 꺼려하셨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아오는 손들을, 끌어 안으려는 팔들을 뿌리치고 밀어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몸… 할머니께 몸이 있었지. 할머니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몸이.’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에서 일박을 한 다음날 새벽, 저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그것은 할머니가 물로 몸을 씻는 소리였습니다. 새벽 다섯 시 즈음이면 할머니는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고는 새벽 하늘에 대고 비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욕실로 가서는 오래오래 자신의 몸을 씻고, 씻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에 부쳐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손도 빌리지 않고 당신의 손으로, 당신 몸을 씻으셨지요.
이제는 만져 볼 수 없는 할머니의 손... 그러고 보니 그 손에는 흰 가재 손수건이 들려 있고는 했습니다. 어미를 잃고 날아든 새끼 비둘기처럼 조용히 겁에 질려 떨고는 하는.
살아 돌아오셨을 때 할머니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세어두셨다가, 나이를 까무룩 잊어버린 할머니께 알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집 떠날 때 할머니는 열다섯 살이었지요.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고향 집을 떠날 때 나이가요. 일본 군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는 줄 모르고요. 6년 내내 가축처럼 군용 트럭에 태워져 중국 광동으로 홍콩으로, 싱가포르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을 보따리 하나만 들고서 떠돌게 되리라는 걸 모르고요.
죄, 죄의식… 할머니는 죄를 지을까 봐 겁내 하셨습니다. 죄는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고 하셨지요, 지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애라도요.
어느 날 할머니는 불쑥 전생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전생에 제비새끼를 죽인 죄 때문에 땅으로 쫓겨났다고요. 그 죄 때문에 그 고통을 당하고, 혈혈단신으로 살아가고 계시다고요. 예순 두 살이 되어서야 할머니는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내셨고, 그 전까지 할머니의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할머니는 슬프게 울고 계셨습니다. 전생의 죄가 아니고서는 당신 인생을 이해할 길이 없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울음 끝에 할머니는 그렇게 혼자 울고는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후의 삶, 그러니까 할머니가 스물 두 살에 살아 돌아와 살아내신 나날들은, 죄의식으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할머니를 뵐 때마다 제가 속으로 감탄하고는 했다는 걸 말씀 드렸던가요. 할머니는 장소를, 사람을 불문하고 한 순간도 권위와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저 존엄이, 저 기품이, 저 자비심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저는 묻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음 끝에 저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복원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도 하셨던 할머니는 스스로 존엄을 되찾으셨고,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의 존엄도 애를 다해 되찾아주셨지요.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던 할머니, 아무도 사랑한 적 없고, 사랑이라는 말조차 입에 담아보지 않고 사셨다는 할머니…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지난 가을 당신의 사비를 털어 마련한 장학금을 전하려 일본까지 날아가서는 조선인 학생들을 만나셨습니다.
눈이 먼 할머니께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제가 여쭈었었지요. 얼굴들이 흐릿한 덩어리로만 보여, 낯선 사람과 식사하는 걸 꺼려하시는 할머니께 저는 어째서 거울을 보여드리고 싶었을까요.
작년 6월 꽃이 만발한 날, 할머니와 저는 마침내 거울 앞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께서 할머니를 사랑하셨으면 좋겠어요.”
거울 앞에 겨우 이르렀는데, 할머니는 어디로 가버리시고 거울 앞에서 저 혼자 서 있습니다. 할머니, 마음으로라도 업보를 짓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셨지요,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으시다고,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으시다고… 용서하고 떠나고 싶으시다고요.
문득 바다가 그립습니다. 할머니께서 그리워하시던 바다가 저도 실은 그리웠습니다. 올 봄에는 할머니께서 횟집을 하셨던 부산 다대포 앞바다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여유가 되면 통영사 백련암 뒷마당의 석등도요.
우리 모두의 할머니인 할머니를 오늘만은 ‘나의 할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나의 할머니… 벌레를 무서워하고, 여름 한낮 비비빅 아이스크림을 즐겨 드시고, 어려서부터 예쁜 옷을 보면 입고 싶어 안달하셨다던 나의 할머니. 고기를 좋아하시면서도 수퇘지고기와 오리고기는 냄새가 나서 싫다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용서를 하고, 바다 앞에 계시는 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겨울 바다 빛인 거울 속에서 할머니의 낮지만 숭고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날 수 있을까.”
김숨 작가는 ‘한 명’(2016)에 이어 지난해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등 위안부 피해자를 기록한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숭고함은…’은 김 할머니의 육성을 담은 증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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