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얼마 전, 눈치도 쓸 데도 없이 지난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가운데 이번엔 7년 전의 설에 만들었던 음식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이었다. 왜 이걸 굳이?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서양 현대 요리를 집대성한 ‘모더니스트 퀴진’의 레시피를 적용한 갈비찜(48시간 저온 조리), 내 저서 ‘한식의 품격’에서 언급한 전(돼지고기는 직접 갈고 채소는 한 번 볶아 물기를 빼고 맛을 들인다)과 잡채 세 가지를 새벽 3시까지 혼자 만들었다. 그 뒤로 나는 갈비찜이나 가끔 압력솥에 속성으로 끓여 먹을 뿐, 동그랑땡이나 잡채를 만들어 먹지 않는다.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런 시기에 식재료를 살펴 보는 글로서, ‘세심한 맛’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조금이라도 명절, 설과 관련된 식재료를 살펴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명절 음식의 부담이 큰 현실에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된 조리의 대부분을 여성이 맡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두 번째 선택지를 살펴 보기로 했다. 명절과 거의 전혀 관계가 없지만 연휴에는 유용할 수 있는 식재료 말이다. 무엇이 있을까. 요 며칠 끓여 먹으며 카레를 생각했다. 일단 향신료의 조합이니 카레는 식재료인 데다가 며칠 두고 먹기에도 좋다. 더군다나 한 솥 불에 올려 놓고 보글보글 끓는 가운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청소와 정리를 끝낼 수 있을 만큼 손도 많이 가지 않는다. 물론 모든 카레가 다 똑같은 건 아니다. 시간과 노력을 크게 더 들이지 않고서도 카레의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맛과 조리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방식을 살펴보자.
간편하게 즐기려면 레토르트ㆍ인스턴트 카레
첫 번째는 완전히 조리된 채로 파우치에 담겨 전자레인지 등에 데우기만 하는 레토르트 카레이다. 1981년 처음 출시되었으니 역사가 짧지도 않을뿐더러 한국 최초의 레토르트 식품이기도 하다. 국산은 기본이고 요즘은 카레 애호가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도전장을 내미는 수입품도 종종 눈에 뜨인다. 이왕 간편함을 선택했다면 밥도 직접 지어 먹기보다 아예 즉석밥으로 짝을 맞춰 주는 게 시너지가 ‘1+1=3’ 이상의 효과를 내 주므로 훨씬 바람직하다. 다만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을 바로 합치면 너무 뜨거워 맛을 느낄 수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 조리 순서로 조금이나마 온도를 관리한다. 일단 즉석밥을 데우고 카레를 데우는 동안 포장지를 완전히 뜯어내 최대한 식힌다. 요즘 같은 겨울이라면 창가나 다용도실 등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잠시 두면 온도가 더 효율적으로 내려간다. 밥을 얼추 식혀 놓으면 막 데운 즉석 카레를 더해도 온도가 그럭저럭 맞아 훨씬 먹기 편해진다.
두 번째는 인스턴트 카레이다. 채소나 고기 등을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초콜릿처럼 생긴 고형이나 가루 제품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시절, 처음 고형 카레를 보고 초콜릿의 한 종류인 줄 알고 씹어 먹어 보았다가 농축된 맛과 향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즉석 제품과 간편함을 견줄 수는 없지만 비교적 간편하게 음식 같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게 인스턴트 카레의 장점이다. 무엇보다 성취감이 요리 자가 학습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감안한다면 인스턴트 카레는 꽤 의미가 있는 식재료이다. 나도 본격적으로 자취를 했던 대학 3, 4학년 시절 카레로 생활 요리를 수련했다. 당시 처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 매운 스팸을 식용유에 지져 맛을 뽑아낸 뒤 양파를 볶고 당근, 감자 순으로 넣어 자주 끓여 먹었다. 자주 끓여 먹다 보니 익숙해져서, 가끔 집으로 부르는 친구들을 위한 붙박이 메뉴로 자리 잡았다.
카레 고기는 지방보다 근육이 많은 부위로
요즘은 주로 뒤에서 살펴 볼 방식으로 끓여 먹지만 가끔은 특유의 맛에 이끌려 인스턴트 카레에 손이 간다. 향신료의 배합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밀가루와 팜유 등 식물성 유지가 걸쭉함을 불어 넣고 글루타민산나트륨이 감칠맛을 보태는 인스턴트 카레는 나름의 요리 문법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맛 전체의 책임을 맡기는 대신 나머지 재료의 조리는 다듬고 격을 높여 준다. 일단 매운 스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기로 바뀌었다. 소나 돼지, 더 나아가 닭이나 양고기 모두 카레에 나름의 맛을 불어 넣어주는 가운데, 적절한 부위의 선택이 중요하다. 운동을 많이 해서 맛이 진하거나 지방이 적절히 섞인 부위를 써야 뭉근히 오래 끓였을 때 부드럽게 분해되는 한편 맛도 북돋아 주기 때문이다.
소라면 마블링이 적절히 섞인 목심이 가장 좋고 구워 먹기는 어려운 자투리 갈빗살도 잘 어울린다. 양도 소와 똑같이 접근해 목심, 어깻살 등을 고른다. 한편 마블링이 별로 없으며 삼겹살, 목살 같은 부위는 직화로 구워 먹는 돼지라면 또렷한 비계층이 있고 가격도 싼 앞뒷다릿살이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닭은 가슴이나 날개보다는 가장 운동을 많이 하는 부위인 넓적다리가 카레에 가장 적합하다. 특정 부위만 모은 부분육은 통째로 파는 백숙용 보다 큰 닭을 가공하므로 푹 끓였을 때 진한 맛이 우러나오는 반면 과조리로 퍽퍽해지지도 않아 제격이다.
고기를 마련했다면 소금과 후추로 간하고 기름을 둘러 중불로 달군 냄비나 팬에 한 켜로 올려 앞, 뒷면을 고루 노릇하게 지진 뒤 잠시 건져내 접시에 담는다. 양파를 잘게 썰어 배어 나온 기름에 투명해질 때까지 볶고 포장지의 레시피에 따라 카레와 물, 고기를 더해 끓어 오르면 약불로 줄이고 뚜껑을 비스듬하게 덮어 30분 가량 끓인다. 고기가 부드럽게 익었다면 당근, 감자 등 좋아하는 채소를 더해 15~20분 더 익힌다. 그런데 왜 양파 외의 채소는 볶지 않는 걸까. 한 켜로 고르게 깔아 센 불로 지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면 깍뚝 썬 단단한 채소를 잠깐 불에 볶는 것으로는 의미 있는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갖 재료를 한 냄비에 담아 뒤적거리다 보면 열효율이 떨어져 잘 익지도 않을 뿐더러 감자는 가장자리가 뭉개지거나 아예 부스러져 버릴 수 있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마무리 단계에 넣어 적절하게 익혀 먹는 게 더 낫다. 만약 당근 등의 채소 맛을 카레에 좀 더 적극적으로 불어 넣고 싶다면 ‘당근’편(한국일보 1월 11일자)에서 살펴 보았듯 ‘투 트랙’이 훨씬 효율적이다. 건더기와 별도로, 국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갈 수 있도록 잘게 썰거나 다져 양파와 함께 볶는다.
카레의 끝판왕, 양념 직접 조제
세 번째는 인스턴트 가루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미리 조제된 가루 제품이 너무나도 다양한 카레의 세계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다만 인스턴트의 특유의 맛은 고수하면서 조미료나 식물성 지방 등이 빠져 조금 더 명료한 카레를 먹고 싶을 때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식이다. 서양에서 유리병에 담겨 나오는 ‘커리’, 일본에서 만든 ‘카레’ 등 선택지도 다양하다. 다만 향신료로만 이루어진 카레 가루를 쓸 때에는 인스턴트 제품이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걸쭉함을 따로 내줘야 한다. 그래야 카레가 줄줄 흐르는 국이 되어 밥알 사이로 스며들지 않는다. 큰 일은 아니고 그저 팜유를 식용유나 버터로 대체하고 밀가루를 더해 볶으면 그만인데, 사실 서양 국물 요리 전반, 특히 스튜에서 흔히 쓰이는 ‘루(Roux)’를 만드는 방법이지만 조금 더 간략해질 수 있다. 두 번째 방식을 따라 고기를 지져 꺼내고 양파를 볶아 투명해지면 밀가루를 솔솔 뿌려, 조금 익어 생밀가루의 냄새가 나지 않을 때까지 함께 볶는다.
이후 과정은 인스턴트 카레와 똑같다. 요즘은 냄비를 뜨겁게 달궈 고기를 지지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압력솥으로 최대한 빨리 카레를 끓인다. 버터를 넉넉히 녹여 양파를 볶다가 밀가루를 더하고 익혀 루를 만든 뒤, 물과 고기를 더해 압력솥을 닫고 최대 압력에서 20~30분 끓인다. 그리고 압력을 낮춰 뚜껑을 열고 당근, 감자 등을 더해 15~20분 더 끓인다. 압력솥의 장점을 취해 고기가 부드러워지는 시간을 줄이는 한편, 졸여 맛을 농축시키지 못하는 단점을 마지막에 보완해주면서 채소까지 익히니 일석삼조이다.
네 번째이자 카레의 끝판왕은 양념 직접 조제이다. 가루 향신료로 만들어도 의미가 있지만 끝판왕이라면 씨앗이나 열매 형태 제품을 권한다. 무엇보다 갓 갈아낸 신선하고도 섬세한 향이 이미 가루를 낸 제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기 때문이다. 카레 끝판왕은 일종의 ‘무규칙 이종격투기’ 같아서 어떤 조합도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이 지면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종류의 향신료를 원하는 대로 섞을 수 있는 가운데, 집에서는 주로 커민, 카르다몸, 고수 씨, 강황, 그리고 약간의 고춧가루를 중심으로 조제한다. 모두 가루 혹은 씨앗의 형태로 마트 등에서 구할 수 있으니 한 번쯤 만들며 인스턴트나 기성품 가루와 향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만약 씨앗을 섞어 만들 경우 지난 주(후추 편, 1월 25일자)에 살펴본 양념 갈이, 절구와 공이 등으로 가루를 낸다.
어떤 방식을 고르든 두 끼 반에서 세 끼 분량의 카레를 끓인다. 일단 막 끓이자마자 한 끼, 다음 날 한 끼를 밥에 얹어 먹고 남은 건 우동면을 버무려 먹는다. 건면보다 이미 익힌 즉석 제품이 제격이다. 끓인 냄비에 담긴 두 끼 분량을 덜어 먹은 뒤, 마지막 남은 카레에 물을 조금 더해 약한 불에서 끓이다가 면을 넣는다. 포장 속에서 뭉쳐 있던 면이 풀어지면 계란 한 개를 깨어 카레에 더하고 그대로 뚜껑을 덮어 수란처럼 익힌다. 마무리로 썬 파나 쪽파를 송송 뿌려 먹는다. 이렇게 연휴 나흘에서 세 끼니만큼은 걱정을 덜 수 있으니, 남는 시간엔 귤이나 까먹으면서 푹 쉰다. 단맛만 너무 두드러지는 타이벡 귤보다 새콤함도 살아 있는 노지 귤이 아무래도 더 맛있다. 독자 여러분의 평안한 연휴를 기원한다.
카레 말고 ‘커리’ 먹을 때는
인스턴트라고 볼 수 없지만 조리는 그만큼 간편한 ‘커리’도 있다.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제품인데 재료를 빻아 페이스트로 가공해 코코넛밀크나 닭육수를 붓고 끓이다가 새우 등의 재료를 더해 마무리하면 10~20분만에 먹을 수 있다. 녹색, 빨간색 등 다른 색깔이 다른 맛을 상징하니 나름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녹색 즉 그린 커리는 녹색 고추, 레드 커리는 빨간 고추를 바탕으로 커민, 마늘, 생강, 고수잎, 레몬그라스 줄기 등을 함께 빻아 만든다. 묽어 스튜보다 수프에 가까운 이들 커리를 끓였다면 ‘날리는 쌀’인 인디카로 밥을 지어 함께 먹으면 잘 어울려 더 맛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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