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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기쁘다! 조선에도 사람이 있구나

입력
2019.02.0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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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의 인구를 가진 나라도 한 사람의 인물다운 인물이 없으면 인물이 있는 작은 나라에 먹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물은 그렇게 중요하다. 1909년 조선이 망해가던 무렵, 안중근 의사가 육혈포로 이등박문을 총살시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망해가던 나라 조선을 온 세계가 눈을 부릅뜨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권을 회복하려고 중국 대륙을 방랑하던 조선의 애국자들이 중국인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라고 한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 원세개가 안중근 의사에게 바친 ‘만사(輓詞)’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준다.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쏘아 침략의 원흉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라는 큰 난리가 일어나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에 침입하려는 현실에 당면했다. 이때 경기도에서 화서 이항로가 거유로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호남에는 노사 기정진이 학문의 종장으로 강학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외적과 화의를 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싸워서 격퇴시켜야 한다고 척화의 상소를 올린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위정척사의 논리가 국가적으로 공식화된 첫 번째의 일이었다. 기정진의 상소가 7월에 있었고, 두 달 뒤인 9월에는 이항로의 척사 상소가 또 올라왔다. 이 두 거유들의 척사 논리가 위정척사의 학파가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한 여론에 힘입어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고히 하면서 외국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는 쾌거를 이룩했다. 쇄국이 옳으냐 개방이 옳으냐는 역사의 평가에 따라야 하지만, 개방 이전에 먼저 국력을 키우고 강병을 육성해야지 불평등한 수교를 해서는 안 된다던 주장 또한 무시할 수 없던 주장임에는 분명했다. 언로를 막고 독재로 빠져들던 대원군에게 비판자들이 나온다. 강고한 독재에 입을 열지 못하던 때에 강골의 선비이자 의기의 사나이 면암 최익현이 대원군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온 나라에 참 선비가 나왔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반성을 모르던 대원군은 정책을 고집하고 있었다. 고종 10년인 1873년 마침내 더 무서운 상소를 올린다. 독재 권력을 탄핵한 당찬 상소였다. 이 상소 한 장으로 대원군은 권좌에서 하야하게 되는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대원군은 하야했고 고종의 친정 체제로 민비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다. 면암은 골육을 이간시켰다는 누명을 쓰고 제주도 귀양살이를 떠나 만고충신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귀양지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고향에서 칩거했다. 그러나 민비 세력은 고종 13년인 1876년 망국의 길을 여는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강직한 직신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무릎을 꿇고 상소를 올린다. 이때 호남의 장성에서 기정진이 강화도 조약의 비보를 듣고 무슨 낯으로 글을 쓰겠느냐면서 붓과 벼루를 물리치면서 절필을 선언했다. 79세의 극노인으로 다른 방법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 무렵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기정진의 처신을 보자. “얼굴에 기쁜 모습을 띠면서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에 인물 없다는 조롱은 면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喜形于色曰 可免東方無人之譏)”라는 내용이다. 한 사람, 최익현의 당찬 기개로 조선에 인물 없다는 비난을 면했다면서 그렇게 기뻐했다는 말이니, 한 인물의 출현은 그렇게 나라의 위신을 살려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일로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 가는 천신만고의 고난을 겪었지만, 그의 강골 기질로 나라의 체면이 설 수 있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런 인연으로 귀양살이가 풀려 돌아올 때마다 최익현은 노학자 기정진을 직접 방문하여 학문을 물었다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항로ㆍ기정진ㆍ최익현이 염려했던 대로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망국 전에 이항로, 기정진은 세상을 떠났으나,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살았던 최익현은 의병대장으로 왜국에 끌려가 단식으로 투쟁하다 장렬한 죽음으로 순국하였다. 최익현이 막지 못한 강화도 조약은 망국으로 이어지고 먼 훗날 우리 세대가 반대했던 한일회담으로 이어졌고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합의라는 불평등의 극치인 외교관계로 진행되었다.

나라의 부끄러움을 면하게 했다는 최익현과 같은 인물도 없는 나라에서 일본과의 불평등한 외교관계가 언제쯤이나 바로 잡힐 것인가. 우리나라를 얕보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우리 국민을 괴롭히는 일본, 역사가 이렇게 반복되기만 한다면 나라의 체면이 어떻게 될 것인가. 보수주의자들이요, 쇄국주의자들이라고 비난만 받는 최익현, 그와 같은 인물이라도 없었다면 망국에 즈음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을 것인가.

대북ㆍ대미ㆍ대일 외교관계가 전례 없이 복잡한 오늘, 안중근 의사 같은 의인이 그리워지고 최익현 같은 당찬 인물이 그리워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방위비 협상으로 민족적 분노가 치솟고, 일본의 극우 논리가 우리의 심사를 괴롭히는 지금, 한 사람의 인물을 대망함이 나 혼자만의 바람이겠는가. 답답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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