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 한국 경제 늪이 되다] <3> 골목상권은 보호만이 해법일까
경쟁력 강화 없는 골목상권 지원정책은 ‘밑빠진 독’
대기업 주도 산업생태계에 소상공인 편입 ‘윈윈 모델’ 찾아야
지난해 결혼한 김선정(가명ㆍ31)씨는 주로 일요일에 남편과 함께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일주일 치 장을 본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평일 저녁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무휴업으로 대형마트가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을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평일 저녁에 미리 대형마트에서 장을 봐두는 편이다. 대형마트가 쉬는 일요일 동네 전통시장을 방문해 봤지만 김 씨가 주로 구입하는 반조리 제품 등은 찾기 어려워서다.
김 씨는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에 간단히 데우기만 해서 먹을 수 있는 반조리 제품을 주로 구입하는데 전통 시장은 직접 요리를 해야 하는 원재료만 팔고 있었다”며 “주차도 불편하고 신용카드도 안받는 곳이 많아서, 웬만하면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직장인 정예선(45ㆍ가명)씨는 쇼핑할 때 소신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이용하는 것은 전통시장이 아닌 대형마트다. 과일을 살 때는 품질 좋은 농산품을 유통하는 A마트, 생수와 라면 등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B마트를 이용하지만 선택지에 전통시장은 없다. 정씨는 “골목상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쇼핑 패턴이 대형마트에 익숙해져 바꾸기가 어렵다”면서 “전통시장은 선물 받은 온누리상품권을 써야할 때만 가게 된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대규모점포의 영업시간을 제한 하고 의무 휴업을 강제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7년이 지났지만, 대형마트가 문을 닫은 날 소비자들의 발길이 전통시장으로 향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조춘한 경기과학기술대 교수가 2017년 발표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에 따른 소비자 행동 변화’ 논문에 따르면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을 동시에 이용하는 소비자 12.9%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에 아예 쇼핑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형마트가 쉬면 다른 지역의 대형마트에 간다거나 온라인 쇼핑을 한다는 소비자도 20%에 육박했다.
이처럼 ‘대형마트 영업 규제=골목상권 보호’의 논리는 허상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판매하는 물건 종류가 제한적인데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고, 주차장 등 편의시설 부족을 문제 삼는 소비자도 있다. 일부는 시장 상인들이 불친절하다거나 포인트 적립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없는 점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모두 전통시장의 경쟁력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정부가 법을 강제한다고 해도 전통시장의 자체 경쟁력이 높아지지 않으면 소비자 발길을 돌릴 수 없다는 의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형마트 문을 닫는다고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이 살아난다고 보는 것은 1차원적인 발상”이라며 “정부 정책은 소비자들이 전통시장 등에서 아쉬워 하는 부분을 찾아 이를 채워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체 경쟁력 강화 없는 ‘무조건 보호’ 무의미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동네 빵집’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성북구에서 동네빵집을 운영하다 2년 전 대기업 제빵 브랜드 가맹점으로 갈아탄 박성구(가명ㆍ48)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반성장위원회는 동네빵집을 포함한 제과점업을 지난 2013년부터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네 빵집 반경 500m 안에는 대기업 계열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서지 못한다. 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은 점포수를 전년 대비 2% 이상 늘릴 수 없다.
박 씨는 이러한 규제가 시행되면 가게 매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규제가 시행되기 전 이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대기업 빵집으로 손님이 몰릴 뿐 박 씨 가게를 찾는 사람은 갈수록 줄었다.
매일 신선한 빵을 굽고 가격을 낮춰 봤지만, 박씨가 만들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빵을 갖추고 각종 통신사 할인과 포인트 적립까지 해주는 대기업 빵집 시스템의 장점을 넘을 순 없었다.
박 씨는 “규제를 피해 가게 인근에 새롭게 들어선 대기업 커피숍들이 빵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매출은 더 줄었다”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2년 전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갈아탔는데, 동네 빵집을 운영할 때 보다는 사정이 조금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처럼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경쟁력 증가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복잡해지는 유통 생태계에서 대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 신세계 하남 스타필드몰, 현대백화점 판교몰에 입점한 소상공인(근로자수 5명 미만에 연평균 매출 50억원 미만)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복합쇼핑몰 입점 이후 이들 가게의 매출이 평균 4.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복합쇼핑몰이 월 2회 강제 휴무할 경우 입점 소상공인들의 매출과 고용은 각각 평균 5.1%, 4%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스타필드에 입점한 한 상인은 “소상공인이 대기업 때문에 무조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며 “소상공인의 밥그릇을 무조건 뺏는 대기업은 규제할 필요가 있지만 대기업이 소상공인과 협력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규제보다 장려책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상생 구조 속 자영업자 자립 도와야
정부의 지원 정책만으로 자영업자들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 생태계에 그들을 편입시켜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도와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국내에서도 대기업과 소상공인이 협력해 이익을 취하는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이마트가 시장 상인들과 상생을 목표로 전국 전통시장에 설치하고 있는 ‘노브랜드 상생스토어’가 대표적이다. 시장에서 팔지 않는 품목을 유통하는 상생스토어는 젊은 소비자층을 전통시장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16년 8월 문을 연 충남 당진전통시장 상생스토어는 전통시장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성비 높은 노브랜드 생활용품과 신선식품을 파는 상생스토어 옆에 약 85평의 놀이터와 카페 등이 들어서자 노년층 고객 중심이던 시장에 20, 30대 젊은 고객의 방문이 늘면서 시장 매출이 동반 상승하고 있다.
당진 전통시장의 2013년 매출을 100으로 봤을 때 2014년은 94.59, 2015년은 102.04로 매출이 줄거나 큰 변화가 없었지만 상생스토어가 오픈한 2016년은 113.25, 2017년은 132.91로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대구 월배시장 상생스토어도 비슷한 효과를 거뒀다. 월배시장은 상생스토어 오픈 이전엔 전체 매장 중 3분의 1만 영업을 했고, 나머지는 공실로 비어있었다. 하지만 상생스토어와 커뮤니티센터(문화센터), 카페, 장난감 놀이터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자 20,30대 주부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오픈 1개월 만에 월배시장 점포의 매출은 평균 30% 이상 증가했다.
상생스토어는 대형마트와 지역 상인들이 공존하는 모델을 구축한 호주의 대형마트 울워스 사례와 닮았다. 울워스는 지역에 매장을 열면 지역 상인들을 매장에 입점시키고 지역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울워스는 지역 상인들이 한 건물 안에서 파는 슈크림빵이나 카스텔라는 판매하지 않고, 상인들이 취급하지 않는 식빵을 파는 식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크게 불편할 게 없다. 한 매장 안에 대형마트와 지역 상인의 점포가 공존하고 있어 길을 건너거나 차를 빼서 이동할 필요가 없다. 오후 5시쯤 문을 닫는 기존 시장과 달리 대형마트인 울워스가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면서 소비자들의 쇼핑 시간이 늘어났고, 입점한 소상공인 가게 매출도 상승곡선을 그렸다. 때문에 호주에서는 울워스 입점을 지역 자영업자들이 반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영업자들을 무조건 보호해야 하는 약자로 보는 시각이 오히려 자영업자들의 경쟁력 확보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대기업과 자영업자의 관계를 적대적으로만 보는 단편적 시각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포화상태인 우리나라 자영업 시장을 고려할 때 자영업 보호는 역설적이게도 구조조정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야 한다”며 “다만 정부가 마련해야 하는 것은 자영업 시장에서 구조조정이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재교육 시켜 취업 시장 등에 나가게 할 것인지를 담은 종합적인 대책”이라고 말했다.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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