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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칼럼] ‘열린 민족주의’ 필요한 한국 외교

입력
2019.02.1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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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거쳐 공동체주의 확립한 유럽

동아시아엔 ‘배타적 민족주의’ 어른거려

中日과 외교 현안, 배타성 버리고 다뤄야

오르한 파무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5명 등 유럽 21개국 지식인 30명이 지난달 25일 영국 가디언과 프랑스 리베라시옹 등 주요 신문에 공동 명의로 성명을 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기초한 성명서는 유럽 각국 내부의 포퓰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고양으로 에라스무스, 단테, 괴테 등에 의해 축적돼온 유럽 공동의 문명과 제도가 위기에 빠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에서 촉발된 브렉시트에 의해,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가 표방하는 미국 제일주의에 의해 유럽 공동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성명서에 이름을 건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애국자”라면서,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 공동체의 이상을 지켜낼 것을 호소했다.

이들의 성명처럼, 유럽의 민족주의는 오랜 기간 단일민족 우월주의, 혹은 전쟁과 결부돼 위험시돼 왔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게르만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로 내몬 기억은 여전히 유럽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런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지도자들은 공동체주의를 문화적ㆍ제도적으로 키워 왔다. 석탄 및 철강 공동체를 구성해 경제적 공동 번영을 모색했고, 각국 대학생들이 타국에서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 상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왔다. 1차 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베르됭 전투 70주년 기념식이나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에 당시 교전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 등의 지도자가 함께 참가해 우호와 협력을 다짐해온 것도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저항적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약소 민족의 생존권과 결부돼 긍정적으로 평가돼 왔다. 특히 민족 분단의 역사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어 민족주의의 이상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다. 다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주의가 자민족의 이익만 중시하거나, 타민족을 적대시하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되어선 안된다. 유럽 지식인들이 호소하는 공동체주의까지는 아니어도, 각각의 차이를 용납하고 민족 간 공동 이익을 찾으려는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유럽 지식인들도 경계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한때 동아시아 공동체론이 사회문화적으로나 정치외교적으로 활발하게 표방됐던 일본에서 지금은 그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이룩한 경제적, 과학기술적 성취를 중화민족 우월주의와 연관시켜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를 곧잘 강조하는 북한도 배타적 민족주의의 경향이 강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면서도 그 저항이 배타적 성향을 지니는 것을 경계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의 의거가 일본이 표방해온 위선적 동양평화와 달리, 한중일 3국이 공동 협의체도 만들고, 공용 화폐도 발행하며, 각국 청소년들이 상호 교류하는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한 것임을 역설했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되,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한국 외교가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현안을 풀어갈 때 가져야 할 자세다. 다른 국가들이 설령 배타적 민족주의를 향해 가더라도, 우리는 열린 민족주의의 비전을 견지해야 한다. 정부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이나 100주년을 맞이하는 3ㆍ1절 기념식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북한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동참도 권유하는 것이 열린 민족주의 외교를 구현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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