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양지혜 대표
작년말 아동권리위서 증언 초청
시민 모금으로 경비 충당 다녀와
침묵하던 정부 출국 전 면담 요청
“저 지난달까지 여권조차 없었어요.”
스위스 제네바에서 귀국한 뒤 지난 12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를 찾은 양지혜(22) 대표. 그는 자기가 제네바에서 벌인 일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럴 만했다. 양 대표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하 청페모)’를 이끌고 있는 활동가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 참석, 6일간 일정을 소화하면서 학교 내 성폭력 문제, 즉 ‘스쿨미투’ 운동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요청은 유엔에서 왔다. 계기는 지난해 11월 아동권리위원회에 한국의 스쿨미투 보고서를 제출한 일이었다. 스쿨미투 운동은 지난해 봄부터 시작됐는데, 정부는 뜨듯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국제사회를 통해 자극을 주고 싶었다. 아동권리위원회도 호응했다.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젠더 이슈를 제기하는 한국의 움직임에 찬사를 보내더니 아예 직접 와서 설명해달라 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하지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결성된 청페모는 “회원 대부분이 청소년이어서 출장비를 마련하기는커녕, 한달 회비 걷어봤자 고작 5만원”인 조그만 단체였다. 방법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가야 했다. 초청 사실을 널리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한 푼 두 푼 후원금이 날아오더니 1주일 만에 480만원을 뚝딱 모았다. 설마, 설마 하다가 부랴부랴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스위스로 날아간 양 대표 일행은 지난 7일 아동권리위원회 사전심의에 참석했다. 스쿨미투의 당사자 위치에 있는 청소년 활동가 백모(18)양이 연단에 올랐다. “가부장의 틀에 여학생을 재단하던 발언들, 은근슬쩍 신체접촉을 하던 남 교사들의 행동들”을 고발했다. 연설이 끝나자 격찬이 쏟아졌다.
무엇이 이런 격찬을 이끌어냈을까. 양 대표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 미투운동에선 청소년이 참가하긴 했지만 한국처럼 조직화된 형태는 없었다 했다”며 “더구나 시민 후원까지 받아 제네바에 올 수 있었다 하니 무척이나 놀라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스스로 변화를 적극 주도하는 모습이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학교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설명할수록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학교와 국가기관은 대체 뭘 하는가”라는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해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그 때마다 한국도 제도는 어느 정도 갖췄는데 가해자에 우호적인 상담 등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거듭 설명해야 했다”며 씁쓸해했다. 또 입시 위주의, 한국 특유의 교육문화에 대한 설명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가 이토록 강한 곳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정도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양 대표는 “한국이 나름 선진국이라 생각했는데 자정 기능이 없다는 점에 충격을 받는 듯 했다”고 전했다.
양 대표의 관심은 9월 열릴 본심의이다. 2~3주 뒤 발표되는 사전심의 결과에 따라 한국의 스쿨미투는 오는 9월 열리는 본심의에 오른다. 본심의에 진출하면 우리나라 정부는 스쿨미투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권고안을 제시한다. 권고안을 받은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이행보고서도 제출해야 한다. 사전심의 때 뜨거운 반응으로 미뤄볼 때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
본심의에 올라가면 “지난해 12월 교육부가 발표한 ‘스쿨미투 종합대책’이 제대로 실행하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미 사전심의를 위해 출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교육부에서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신경 쓰인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우리가 유엔에 갔다는 것 자체가 성과 아닐까요? 진짜 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지요.” 양 대표의 다짐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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