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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속 ‘작은 평양’서 차려진 탈북민의 옥수수국수

입력
2019.02.16 09:0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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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당신의 런던] 

 탈북민 700여명 자립 돕는 시민단체에서 북한 음식 요리교실 열어 

 시민 40여명 몰려 매진… 탈북민 “오늘 만든 건 북한선 천국 같은 국수” 

지난 7일 런던에서 열린 '탈북민과 함께하는 북한 음식 요리 교실'. 옥수수국수를 만드는 탈북민 요리사의 진지한 손길에 숨죽인 참가자들의 시선이 꽂혔다.
지난 7일 런던에서 열린 '탈북민과 함께하는 북한 음식 요리 교실'. 옥수수국수를 만드는 탈북민 요리사의 진지한 손길에 숨죽인 참가자들의 시선이 꽂혔다.

올드스트릿 역에 내려 런던의 작은 평양으로 가는 길은 북한 관영 언론인 조선중앙통신에서 보던 풍경과는 판이했다. 해가 진 거리에 형형색색 간판이 줄이었고, 실험적 패션을 찰떡같이 소화하는 젊은이들이 영화처럼 스쳐 갔다. 엄연히 불법이지만 흔하디흔한 마리화나 냄새도 골목마다 코를 찔렀다.

설 연휴를 막 지난 7일, 런던 동부의 ‘힙한’ 동네 쇼디치에서 북한 이탈 주민과 함께하는 북한 음식 요리 교실이 열렸다. 영국 내 탈북민의 자립을 돕는 시민단체 ‘커넥트북한’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탈북 여성 요리사가 옥수수국수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영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은 공식적으로 약 700명. 런던은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가장 큰 탈북민 커뮤니티를 가진 도시이다. 이들은 한인타운이 형성된 남서부 뉴몰든 지역에 주로 산다. 영국 내 난민이 12만명(2017년 기준)이 넘는 점을 감안하면 탈북민은 여전히 소수 집단이다. 영국인들은 ‘핵’과 ‘김정은’의 나라를 탈출한 수백 명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행사 티켓이 일찌감치 매진됐다는 건 꽤 놀라웠다. 한화로 약 6만~7만5,000원에 달하는 가격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요즘 런던의 시민단체들은 후원금이 포함된 유료 행사를 종종 연다. 단체 행진 참가에 3만원, 마라톤 뛰기에 8만원하는 식이다)

코스모폴리탄 도시답게 이날 요리 교실에 참가한 40여 명은 국적과 연령, 인종 면에서 스펙트럼이 넓었다. “케이팝을 좋아한다”며 기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참가자를 보며 한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케이팝에서 출발해 북한 음식에 가 닿는 그 의식의 흐름 과정이 좀 별나다고는 생각했다.

중년 한국 여성의 흔한 커트 머리를 하고 노란색 앞치마를 두른 탈북민 요리사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한 말만 했다. 말소리는 작았고, 이따금 빙그레 웃었다. 매일 남의 언어로 소통하느라 고역인 내게 통역사 영어가 더 잘 들릴 정도였다.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그는 제이미 올리버, 고든 램지처럼 예능인에 가까운 셰프들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낯설면서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이라는 통제사회의 유산이라 해석하기엔 지나쳤다. 그는 수십 명의 낯선 이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기에 수줍음이 많은 성정을 갖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모두가 바짝 다가서고도 속 시원히 듣지 못하는 듯했지만, 아무도 불만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삶아낸 면을 일 인분씩 돌돌 말아 체에 밭쳐두는 손길에서 서울 엄마가 그리워졌다.

“오늘 만든 건 천국 같은 국수에요. 북한의 진짜 옥수수 국수는 강냉이 껍질과 눈도 빼내지 않기 때문에 거칠거칠합니다.” 2008년 영국으로 탈북, 커넥트북한 봉사활동 담당자로 있는 박지현(50)씨는 조리대를 오가며 설명하기 바빴다. 그는 “국수는 밥을 지을 때보다 많은 곡물을 쓰기 때문에 북한 부모들이 꺼리는 메뉴”라며 “옥수수죽이 더 흔하고 국수를 먹더라도 퉁퉁 불려 양을 늘린다”고 덧붙였다.

처음 맛보는 옥수수국수는 우리 잔치국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계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부쳐낸 지단과 기름에 볶은 호박, 당근, 무가 탱글탱글하게 삶긴 면발 위에 고명으로 얹혔다. 취향에 따라 채 썬 김치도 곁들일 수 있었다. 평양냉면 외 새로운 북한 음식을 접한다는 설렘이 다소 허무하게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런던 토박이인 참가자 제이슨 리어는 “일주일에 다섯 번은 한국 음식을 먹는 것 같다”며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로 북한 빈대떡도 만든다”고 했다. 그는 북한 음식이 간이 세지 않고, 고춧가루 양념이 적다는 사실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300명 넘는 회원을 보유한 ‘한국과 일본 문화’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자라는 그에게 북한사람과 남한사람은 마치 중국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말하듯 담백했다.

탈북민들은 사회보장제도와 신변안전문제, 영어교육의 기회 등을 이유로 영국행을 택한다고 한다. 관련 논문들에 따르면 한국으로 1차 탈북했다가 영국으로 재탈출하는 사례도 많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알고도 제3국을 택하는 건 한국에서의 차별이 큰 탓이다.

외국에 나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단연코 “한국에서 왔어? 남한? 아니면 북한?”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당연히 남한이지(Of course, the South)”라고 답하기 일쑤였다. 미국계 한국인 작가 수키 김은 ‘평양의 영어선생님’이라는 책에서 이를 “터무니없는 질문”이라며 “나 또는 어느 한국인이건 세계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북한 출신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고 썼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이 문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답이 얼마나 오만하고 차별적이었는가를 생각한다. 행사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편견을 갖고 있던 건 “탈북자들을 직접 보니까 어떠세요”라고 묻고 있는 나였다. 제이슨은 “탈북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돼 기쁘다”고 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의 ‘탈북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겠지만 내 마음은 조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참고문헌: Song, Jay Jiyoung "North Korean secondary asylum in the UK"

Watson, Iain “The Korean diaspora and belonging in the UK: identity tension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ns”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강준구 기자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3년부터 국경없는기자회에서 일한다. 현재 영국 런던 시티대에서 탐사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을 공부하고 있다.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3년부터 국경없는기자회에서 일한다. 현재 영국 런던 시티대에서 탐사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을 공부하고 있다.

※‘세계의 축소판’ 같은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런던의 이야기를 3주에 한 번씩 연재한다. 난센스에 가까운 단일민족문화를 천명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여전히 수많은 고정관념과 분투 중이다. '런던, 당신의 런던'은 이런 기자가 도시에 대한 개인적 물음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고, 당사자에게 물으며 써 내려 간 결과물이다. (런던에 살기는 두 번째다. 첫 번째에는 잘 보지 못했던 이 사회의 속살을 한 꺼풀 벗겨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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