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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빼앗기고 소외되고 오염되고… 중남미 분쟁의 씨앗 ‘토지 분배’

입력
2019.02.15 19:00
수정
2019.02.15 20:3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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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1년 전통 의상을 입은 반란군 여성들이 총기를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다. 멕시코혁명은 33년간 장기 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군부정권에 대항해 농지 개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세우며 발발한 민중 봉기로, 20세기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국의회도서관 자료사진
멕시코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1년 전통 의상을 입은 반란군 여성들이 총기를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다. 멕시코혁명은 33년간 장기 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군부정권에 대항해 농지 개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내세우며 발발한 민중 봉기로, 20세기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국의회도서관 자료사진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불평등한 토지 분배 문제는 1492년 콜럼버스 이후 근 300년간 식민시기, 19세기 초반 독립 그리고 20세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정치ㆍ경제는 물론 사회문화 영역에서 갈등과 분쟁의 핵심 이슈다. 특히 오늘날에는 무분별한 토지 이용으로 자연환경 영역으로까지 문제가 확대되며 갈등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면서, 토지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만연한 정치 불안정, 경제 저발전, 사회적 불평등, 환경 악화 등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독립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오랜 식민시기 동안 스페인-포르투갈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된 ‘아시엔다(hacienda)' 대토지 소유 시스템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대농장’을 가리키는 스페인어로, 소수 지배 엘리트들은 수탈한 원주민의 토지나 미개척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관리ㆍ운영했다. 아시엔다는 19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식민 유산으로 대물림되어 오늘날까지 이들 지역의 불안정, 저발전,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멕시코시티 왕궁에 그려져 있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멕시코의 역사’ 일부. 대토지 소유자와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던 디아스 군부정권을 타도하고 반식민지적 사회로의 변혁을 요구했던 멕시코혁명(1910~1917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농민군 지도자이자 토지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멕시코 혁명의 ‘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 슬로건을 들고 있다. 위키피디아 캡처
멕시코시티 왕궁에 그려져 있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멕시코의 역사’ 일부. 대토지 소유자와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던 디아스 군부정권을 타도하고 반식민지적 사회로의 변혁을 요구했던 멕시코혁명(1910~1917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농민군 지도자이자 토지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멕시코 혁명의 ‘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 슬로건을 들고 있다. 위키피디아 캡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이처럼 16세기부터 축적된 봉건적 토지 분배 제도의 폐단으로 소수에게 정치경제 권력이 집중되면서, 수직적ㆍ계급적 사회구조가 형성됐다. 이로 인해 19세기 초 독립 후에도 정치경제 독과점 체제가 팽배하게 됐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마침내 토지의 비효율적 활용으로 인한 경제 저발전, 소득 분배 악화 및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인식한 이들이 토지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 목소리를 높이면서, 첨예한 사회적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1917년)보다 몇 년 앞선 1910년 발생한 멕시코 혁명은 ‘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불평등한 토지 분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나타났다. 혁명 이후 멕시코제도혁명당(PRI) 정부는 6년간(1917~1922년) 멕시코 대토지 소유자들로부터 무려 1억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몰수하는데, 이는 당시 멕시코 영토 내 경작 가능한 토지의 5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정부는 농촌 정착민을 포함, 식민시기 동안 토지 분배에서 가장 소외됐던 멕시코 원주민공동체들을 대상으로 공동소유 방식의 ’에히도(ejidos)‘ 제도를 도입해 토지를 분배했고 이들 공동체에게 자치적 토지 이용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에히도 제도에서는 마을이 토지를 보유했으며, 구성원들은 경작권과 소유권만을 가졌다.

페루의 좌파 군인 출신 대통령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1968년 쿠데타 집권 후 토지개혁법(1969년)을 포고해 미국인 소유지를 접수한 뒤, 페루 농민에게 분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방송사와 은행 등의 국유화 및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실시하는 등 일련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지만, 1975년 무혈쿠데타에 의해 퇴진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페루의 좌파 군인 출신 대통령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벨라스코 알바라도는 1968년 쿠데타 집권 후 토지개혁법(1969년)을 포고해 미국인 소유지를 접수한 뒤, 페루 농민에게 분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방송사와 은행 등의 국유화 및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실시하는 등 일련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지만, 1975년 무혈쿠데타에 의해 퇴진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남미 페루의 토지 분배 갈등은 1968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벨라스코 알바라도(Velasco Alvarado) 정권의 급진적인 토지 개혁 정책이 도입되면서 발생했다. 1969~1975년 약 1,000만 헥타르의 토지가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고, 이는 바로 농촌 노동자들에게 분배됐다.

중미 니카라과에서는 1979년 소모사 독재 정부를 붕괴시키고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집권한 산디니스타(Sandinista) 좌파 정부가 토지 개혁을 시작했다. 혁명 정부는 회복 불능 상태에 놓인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소모사 일가와 고위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해 전체 약 25%에 달하는 토지를 국영기업, 협동농장 그리고 농촌의 가족농 등에게 나누어 줬다. 이로써 1983년까지 약 7만명의 농부들과 약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가 분배됐다.

현존하는 중남미 최대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 대원들이 남부 치아파스주 라 가루차 마을의 에밀리아노 사파타 벽화 앞에 서 있다. EZLN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제 반대와 원주민 착취 중단을 요구하며 1994년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무장투쟁을 벌여 왔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존하는 중남미 최대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 대원들이 남부 치아파스주 라 가루차 마을의 에밀리아노 사파타 벽화 앞에 서 있다. EZLN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제 반대와 원주민 착취 중단을 요구하며 1994년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무장투쟁을 벌여 왔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소수에게 집중된 토지 소유권을 공유지화하거나, 원주민 공동체ㆍ농민에게 보다 균등하게 분배하려는 노력들은 90년대 들어 다른 갈등 국면으로 전환된다. 라틴아메리카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80년대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 구조조정 과정이 시작되면서다. 이 과정에서 수용한 신자유주의 경제 처방은 새로운 토지 분배 방식으로의 전환, 특히 시장 중심 분배 방식으로 변화를 이들 국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혁명의 상징이었던 에히도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동안 원주민 공동체에게 부여된 공동소유권, 토지 이전 및 양도 불가 등을 담은 법적 조항들은 1992년 멕시코 헌법개정으로 사라졌다. 투자 자본에게 매매가 허용되면서 결과적으로 기존 에히도 토지의 3분의 2가 사적 부문에 매매됐다. 페루 역시 1995년 민간투자법 도입 이후, 그에 앞서 농업개혁법(1969년)을 통해 국가가 관리하던 일정 부문의 토지들에 대한 국가 규제 및 보호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점차 매매 대상으로 전략해 갔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주에서는 멕시코 혁명 당시 농지 개혁 운동 지도자였던 사파타(Zapata)를 계승한 사빠띠스타(Zapatista) 원주민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토지소유 방식을 놓고 또 다른 정치경제적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오랜 역사 발전 과정에서 토지 소유와 분배 문제, 특히 지나치게 소수에게 집중된 불평등한 소유 구조는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저발전 혹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와 강한 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 지역의 최대 갈등ㆍ분쟁 이슈로 남아 있다.

지난달 25일 브라질 남부 미나스제라이스주 브루마지뉴의 광산 폐수 저장용 댐 3개가 동시에 붕괴하면서 150여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3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브라질 국립광업관리국(ANM)의 자료에 따르면 광산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미나스제라이스주에만 사실상 방치된 광산이 400여여 곳에 이른다.
지난달 25일 브라질 남부 미나스제라이스주 브루마지뉴의 광산 폐수 저장용 댐 3개가 동시에 붕괴하면서 150여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3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브라질 국립광업관리국(ANM)의 자료에 따르면 광산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미나스제라이스주에만 사실상 방치된 광산이 400여여 곳에 이른다.

한편,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게 토지는 ‘공공재인가, 공유재인가 아니면 사유재인가’, 즉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더해 또 다른 영역에서도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로 ‘지속가능한 토지’의 보호 혹은 보존의 문제다.

21세기 들어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환경 문제는 방대하고 복잡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토양악화’ 문제다. 이는 대부분 침식과 농업 및 광산업 활동 증가 등 다양한 유형의 인간 활동에 따른 오염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달 25일 브라질 남동부 지역 광산댐 붕괴사고로 330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긴 참사와 관련해서도 “무분별한 광산 개발 속에서 채광 활동과 댐 관리에 대한 당국의 관리 감독이 소홀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정부가 최근 환경단체와 원주민 보호단체 등의 반대에도 불구,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에 다리와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등의 개발 계획을 강행한 것도 갈등을 낳고 있다.

토양 악화는 산림의 손실, 서식지 손실과 파괴로 인한 생물다양성 감소 등 수많은 생태 환경에 연쇄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 토지의 ‘지속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수많은 관찰 보고서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미래 세대가 지불해야 할 환경적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사회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토지의 소유가 라틴아메리카 식민 유산의 전형이라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개발과 보호의 관계에 있어 이 지역의 토지는 또 다른 생태적 식민화를 경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수탈된 대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다양한 영역에서 첨예화하고 있다.

하상섭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교수
하상섭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교수
중남미 국가별 토지분재지니계수 및 대륙별 토지분배 지니계수. 김대훈 기자
중남미 국가별 토지분재지니계수 및 대륙별 토지분배 지니계수. 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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