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이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는 지난 15일 최 시인의 의혹 제기가 허위가 아니며 위법성도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 시인의 글 내용과 법정 진술이 일관되고, 제보한 동기와 경위 등을 따져보면 허위라 의심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한국 문단 거목의 성추행 의혹을 둘러싼 법적 판단이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성폭력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패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재판부가 최 시인의 폭로에 대해 위법성이 없다고 본 이유는 사실적시 여부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한 때문이다. 현행법은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를 줬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부는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 제기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동으로 위법하지 않다고 봤다. “최 시인은 저명한 원로 문인으로서 문화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 시인이 공개된 장소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린 것으로, 그 내용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며 목적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권력형 성범죄가 만연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투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였다. 가해자에게 유리한 법체계와 판결을 믿고 미투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고소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나설 때도 가해자의 실명을 폭로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고, 가해자의 실명을 고발할 때는 피해자가 익명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판부의 적극적 법 해석 이전에 보편적 적용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가령 형법의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 삭제를 검토할 만하다. 2016년 서울변호사회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9.9%가 폐지에 찬성했고 16.5%는 유지하더라도 징역형을 삭제하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고, 같은 당의 한정애 의원도 지난 1일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피해자의 ‘불의를 말할 자유’를 막는 명예훼손죄는 고치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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