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리치 해리스(1938~2018)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20세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의심과 과학ㆍ실증주의의 명료한 매력이 행동주의 심리학을 낳았다. 행동주의자들은 인간 정신 혹은 심리를 무의식, 억압, 꿈, 초자아 같은 모호한 것들을 미심쩍게 ‘해석’하는 대신 자극-반응 등의 가시적 양태를 분석함으로써 심리-행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고, 적절히 개입(조건화)하면 의도한 행동(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존 B. 왓슨(John B. Watson, 1878~1958)은 그 자신감을 1924년 저서에 이렇게 드러냈다.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영아를 맡겨보라. 잘 만들어진 나의 특수한 세계 속에서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면 나는 아이를 내가 원하는 어떤 직업으로도, 예컨대 의사나 변호사, 화가, 사기꾼, 심지어는 거지나 도둑으로도 키울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 아이의 재능이나 기질, 능력, 인종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에서 재인용)
행동주의 심리학을 더 정교하게 다듬은 하버드대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는 흰쥐의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실험, 즉 쥐가 특정 반응을 할 때만 먹이를 줌으로써 해당 반응의 빈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실험 결과에 근거해, 저 유명한 ‘강화이론’을 만들었다. 적절한 보상(혹은 처벌)을 반복함으로써 특정 반응(행동)을 유도ㆍ강화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아이를 화가로 키우려면 그림을 그릴 때마다 간식을 주면 된다는 거였다. 왓슨과 스키너의 저 가설들은 후속 연구를 통해 검증되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적 영향(간식을 끊으면 일반 아이들보다 더 그림을 안 그리는 등)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처를 입었고, 성격ㆍ지능의 유전적 영향을 규명해온 행동유전학의 개입으로 행동주의의 기세도 점차 누그러졌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심리학, 특히 영ㆍ유아기서부터 성년-노년에 이르는 인간의 지적ㆍ정서적ㆍ사회적 심리와 행동 양태의 전개를 연구하는 발달심리학은 유전적 본성의 지분을 인정하면서도 환경적 개입, 특히 유ㆍ청소년기 양육의 중요성을 중시했다. 인간의 인격적 ‘틀(Template)’이 주로 유년기에 형성되므로,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아이의 성격과 재능과 사회적 가치관 등등이 결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발달심리학의 주요 전제다. 유전과 환경, 더 흔히 ‘본성과 양육(Nature and Nurture)’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중점은 ‘양육’에 있었고,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에게 지워졌다. 이혼-편부모 가정 아이들과 일반가정 아이들을 대비한 숱한 연구에서부터 중독 등 안 좋은 습관의 대물림 경향 연구 등이 잇따랐다. 양육의 중요성은 근 한 세기 동안 유전자만큼이나 확고한 과학적 지위를 지닌 ‘신성한 불후의 믿음(sacred enduring beliefs)’이었고, 일반인들에게도 상식처럼 자리잡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양육법 책들과 전문가의 말들이 성가실 만큼 넘쳐나게 됐다. 한 마디로 자식이 잘못되는 건 대체로 부모 탓이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는 저 ‘믿음’을 폐기해야 할 오류투성이 ‘가설(Assumption)’일 뿐이라고 주장한 심리학자다. 그는 1995년 미국의 권위 있는 심리학회지 ‘Psychological Review’에 발표한 논문 ‘Where is the child’s environment? A group socialization theory of development’에서 양육은 아이의 인성과 사회화에 극히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며 결정적인 환경은 집 바깥의 또래그룹, 엄밀히 말하면 아이들의 ‘사회적 범주(social category)’ 즉 그들이 본받고자 하는 준거집단이라는 ‘집단사회화 이론’을 제시했다. 논문의 요지를 풀어 3년 뒤 출간한 대중서 ‘양육 가설 Nuture Asumption’(최수근 옮김, 이김 펴냄)에서 그는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당신은 아이를 완벽하게 만들 수도 망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표현한 바 “전통 심리학의 따귀를 때리”며(초판 서문), 권위와 이해에 쉽사리 굴절하는 (심리)학계의 병폐를 매섭게 비판해온 아웃사이더 심리학자 주디스 해리스가 지난해 12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해리스는 1938년 2월 10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부계 유전성 자가면역 질환으로, 할아버지는 악성빈혈로 요절했고 아버지는 강직성 척수염을 앓았다. 강직성 척수염은 척추 염증이 전신 관절로 퍼져 통증과 함께 척추가 굳어지는 질환. 가족은 아버지의 병증 완화를 위해 자주 이사를 다닌 끝에 애리조나 투손(Tucson)에 정착했다. 해리스는 거기서 고교를 졸업하고 애리조나대와 매사추세츠 주 브랜다이스대(심리학)를 우등 졸업한 뒤 스키너가 종신 교수로 있던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박사과정 입학불허 통보를 받은 건 60년이었다. 확실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학과장(직무대행)이던 인지심리학의 대가 조지 밀러(George A. Miller, 1920~2012)가 서명한 통지서에는 “당신의 연구가 우리 대학이 요구하는 실험심리학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상당한 의심이 든다”며, “독창성과 독립성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었다. 2016년 9월 영국 심리학회지 ‘The Psychologist’ 인터뷰에서 그는 “운명이 레몬을 던져주면 어쩔 수 없이 깨물어야 할 때도 있다. 대학서 쫓겨난 건 당시 내겐 치명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하버드가 내게 줄 수 있던 최선이었다. 그 덕에 나는 소위 ‘전문가들(experts)’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세뇌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석사로 대학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논문은 그 해 심리학 석사논문상을 수상했다.
대학서 만난 찰스 해리스(Charles S. Harris)와 61년 결혼한 뒤 주디스 해리스는 M.I.T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강사와 조교로 일했고, 나란히 뉴저지의 벨 연구소에서 취직해 주디스는 연구조교로, 찰스는 기초연구원으로 23년간 재직했다. 그 사이 몇 편의 논문을 썼고, 딸 노미(Nomi)를 낳았고, 일레인(Elaine)을 입양해 키웠다. 해리스가 강직성 척추염 진단을 받은 건 39세 되던 1977년이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둔 뒤 집에서, 통증과 합병증(폐고혈압)에 시달리며 발달심리학 관련 대학 교재인 84년의 ‘The Child’와 92년의 ‘Infant and Child’를 공저로 펴냈다. 그 이력을 두고 훗날 주류 심리학계는 그를 연구자가 아닌 ‘개작자 rewriter’라고 조롱했지만, 그에겐 그 과정이 발달심리학 연구성과들에 대한 치열한 메타연구였다.
뭔가 잘못됐다고 깨닫기 시작한 건 94년 1월 청소년 비행에 대한 논문을 읽던 중이었다고 한다.(newyorker.com) 그 논문은 청소년 비행의 기제를 성인 모방행위로 설명했지만, 정반대의 주장 즉 청소년들은 부모보다 또래집단에게서 더 많이 배우고 그들을 모방한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앞서 읽은 터였다. 그는 이후 6개월여 동안 심리학과 인류학 관련 논문들을 추적, 발달심리학의 전통적 입장인 전자의 주장을 담은 논문들의 실험 설계 오류와 추론의 허점들을 찾아냈다. 그 중에는 오히려 후자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도 존재했다. 이민자 자녀들의 억양 등 언어 특성이 부모보다 또래 집단을 닮는다는 것, 양부모가 입양아의 지능이나 성격, 개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다른 가정에서 성장해도 기질과 성격 등이 유사하다는 것 등등. 그 결과가 95년 논문이었다. 미국심리학회(APA)는 해리스에게 35년 전 그의 박사과정 자격을 박탈한 교수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 ‘Geroge A. Miller상’을 98년 수여했다.
2006년 에세이에서(edge.org) 해리스는 논문을 쓸 당시 “나는 내 판단을 확신하지 않았다. 설득력 있는 반박 논거가 제기되면 언제든 폐기한다는 것을 전제한 귀무가설(歸無假說)의 입장을 유지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논문의 조심스러운 어조와 달리 그의 98년 수상 연설은 훨씬 단호했다. “양육가설은 행동주의자들이 더러운 목욕물을 쏟으며 함께 버리지 못한 프로이트 심리학의 유산 중 하나다.(…) 프로이트 심리학자와 행동주의자들은 부모가 어떻게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느냐의 문제에서 입장이 달랐지만, 부모의 영향력 자체에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다”(web.archive.org) ‘양육 가설’의 허점을 ‘집단사회화 가설’로 보강해 발달심리학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주류 심리학계는 경악했다. 가령 “10대들이 어른(부모)을 닮고자 했다면 약국서 매니큐어를 훔치거나 고가도로에 매달려 스프레이로 ‘I Love You Lisa’같은 낙서를 하진 않을 것이다. 정말 그들이 ‘성숙한 어른들’을 동경한다면 따분하게 앉아 빨래를 개고 소득세를 계산하려 했을 것이다. 10대들은 어른을 닮으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과 차별화하려고 한다”는 주장이나, “부모들이 자녀의 성격이나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 영향은 특정 상황, 특히 집 안에서 그렇다. 현관만 나서면 그들은, 엄마가 짜준 바보 같은 스웨터(dorky sweater)를 벗어버리듯, 집에서 익힌 태도들을 벗어 던진다”는 말들은, 도발적이고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주류학계는 그의 자격과 역량을 들먹이며 대체로 비난하거나 무시했다. 하버드대의 한 교수(Jerome Kagan)는 “심리학의 수치(embarrassed for psychology)”라 평했고, 한 학자(T. Berry Brazelton)는 “터무니없는 주장(absurd)”이라고 일축했다. 한 코넬대 명예교수(Urie Bronfenbrenner)는 “진지하게 평가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언론은 ‘부모가 대수롭지 않다고? Parents Doesn’t Matter?’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 논란을 소개하곤 했다. APA 전 회장 팔리는 해리스의 주장은 어리석고 위험하다며 “부모들이 그의 주장을 믿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라.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다? 고된 일과 뒤 아이에게 관심을 안 쏟아도 된다? 부모는 대수롭지 않기 때문에?”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2006년 에세이에서 해리스는 저 말을 반박하며 “팔리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베푸는 유일한 이유가 아이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침팬지 어미들도 새끼를 애정으로 보살핀다. 과연 침팬지도 훌륭한 침팬지로 자라게 하려고 그럴까?”라고 썼다. 해리스는 거꾸로 “부모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란 사실은, 위험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모와 자식에게 신선한 공기 같은 것이다. 자녀의 취약한 정신을 잘 다듬어줘야 한다는, 부모 노릇에 대한 믿음과 문화적 강제 때문에 부모는 녹초가 되곤 한다. 화나는 특별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고 위선을 떨어야 한다.” 해리스는 “내가 아동 학대나 방치를 두둔하는 게 아니다. 부모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주장한 적도 없다. 부모-자녀 관계는, 부부관계처럼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관계는 둘 다 행복하고 상대의 행복을 통해 서로의 행복을 찾는 관계이지, 한쪽이 어느 한쪽의 인간성을 직조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을 일방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비극이란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전권을 행사하는, 그래서 비난도 몽땅 감수해야 하는 부모란 존재를 상정하는 태도(양육가설)다.”(edge.org)
해리스는 비판에 대한 재반박과 방대한 각주를 첨가한 ‘양육가설’ 개정판(2009년)을 냈고, 성격 등의 ‘준거집단’ 동질화와 대비되는 개인들의 차별화 메커니즘을 보강한 ‘개성의 탄생 No Two Alike(2006)’(곽미경 옮김, 동녘사이언스)을 출간했다.
인류 지성사의 진전이 모든 국면에서 ‘사실 fact’의 우위 속에 전개된 건 아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이나 다윈 진화론, 태양이 암석이 아닌 수소 헬륨 기체 항성임을 규명한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의 수난처럼, 그릇된 ‘믿음’을 공유한 주류 집단의 충성스러운 결속력 혹은 이데올로기에 짓눌린 예는 의외로 많다. ‘The Third Culture’는, 새롭고 도발적인 인식이나 가설을 일반 대중에게 최대한 쉬운 언어로 소개하자고 모인 과학자 집단이고, 보수적인 주류학술지의 대안으로 개설한 온라인 공간이 ‘Edge.org’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 등이 그 공간의 열성적 회원이다. 주디스 해리스의 주요 활동 무대도 거기였다. 그는 자신의 가설들을 거기 공개해 관련 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했고, 자연선택과 성선택에 더해 ‘부모선택(Parental Selection)’이 인류 진화에 유의미하게 개입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2003년 백악관 과학 자문역을 맡아달라는 당시 대통령 부시의 제안을 사양하며 과학의 본질과 과학자적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에세이를 썼고, 2016년 에세도 ‘과학 연구의 트루시니스(Truthiness)’의 주제도 사실과 관계 없이 믿고 싶은 바를 사실로 인식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실험데이터 조작과 누락 등 엉터리 논문이 양산되는 두 가지 주요 원인과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는 연구 목적과 동기가 학문적 즐거움과 호기심이 아닌 학계의 인정과 경력의 이점을 추구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며, 그 때문에 학술지도 논문도 너무 많고, 무의미하고 따분하고 심지어 엉터리인 논문도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논문의 양이 아니라 질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그는 논문에 대한 파행적 심사 관행을 지적했다. 논문 게재 여부를 검토하는 전문가들은 해당 연구의 가치와 절차적 타당성 못지않게 그 논문의 결론이 자신들의 학문적 입장과 성취에 유리한지 여부를 따지게 된다는 거였다. 그런 이기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논문 분석 집단을 전문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수학ㆍ자연과학과 달리 심리학은 계산ㆍ실험을 통한 절대적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한 학문이다. 그래서 세력의 논리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해리스는 혼자였다. 스티븐 핑커 등 행동유전학계가 그를 지지하긴 했지만, 도와줄 스승도 제자도 학위도 없고 몸도 성치 않았다. 그는 끝내 물러설 줄 모르는 인파이터였다. 그 투지로 그는 냉소의 유혹과도 싸웠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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